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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왔다

인도 컴백

by 폼폼토스

트렁크를 잔뜩 쌓은 카트를 밀고 엑스레이를 통과할 때 나는 살짝 긴장했다. 여러 번의 경험으로 캐리어 안의 고기를 들킬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앞서 귀국한 지인들의 얘기를 들으니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하나 둘 셋!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며 엑스레이를 무사히 지나니 열린 자동문 틈으로 빼꼼 바깥이 보인다. 인구 대국의 명성에 걸맞게 수백 명의 머리가 빼곡하게 들어찬 광경! 얼굴에 와닿는 훅한 열기, 공기에 스민 흙먼지 냄새에 이곳에 돌아왔음을 느낀다. 난생처음 인도 땅을 밟았을 때 맡았던 설명할 수 없었던 그 냄새를 이제는 정확히 그릴 수 있다. 아니, 이젠 그 냄새를 분명하게 자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이곳에 마음을 붙이게 된 것이다.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 빨리 이 주렁주렁 트렁크들을 차에 싣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두 다리 뻗어야지! 기사가 운전해 주는 차를 타고!


아이의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을 방문하느라 두 달 동안 집을 떠나 있었다. 1년 만에 간 한국은 늘 그랬듯 모든 것이 편리하고 빠르고 쾌적했다. 살 것도 많았고 할 것도 많았다. 그만큼 혼자서 조용하게 느리게 시간을 보내기는 힘들었다. 인도 생활 초창기 아는 사람 하나 없었던 시절, 무슨 짓을 해도 느리게 흘러가는 길고 긴 시간에 질렸었는데, 이제는 그 시간을 그리워하게 될 줄이야.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면 그 시간들을 더 온전히 즐기게 될 테니, 한국에서의 바쁜 시간을 감사하게 즐겼다. 두 달은 후딱 지나갔다. 다시 인도에 돌아온 지 일주일, 시간은 어떨 땐 빠르게, 어떨 땐 느리게 흘러가고 있다.


딱히 하는 일은 없었지만 분주한 두 달을 보내면서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이제 1년 반 후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 텐데 나는 그 속도에 다시 적응할 수 있을까. 내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데 한국 가면 더 몇 배로 흘러가는 거 아닌가. 분명한 건 인도보다 시간은 빨리 흘러갈 테니 어서 정신 차리고 남은 동안 이곳을 즐겨야겠다!


즐기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선, 방학 동안 중단했던 골프를 다시 시작할 것이다. 길도 교통수단도 불편한 이곳에서 골프는 내가 유일하게 외출할 수 있는 당당한 이유이므로. 괜히 친하지도 않은 사람 만나서 기 빨리게 수다 떨고 돈 쓰는 것보다 훨씬 낫다. 주 2-3회의 골프라니. 먼저 한국으로 돌아간 지인들은 골프백 처박아 두고 아이들 라이딩에 여념이 없는데 이 얼마나 복 받은 일상인지!


글도 다시 쓸 것이다. 새로운 연재를 시작하고, 연말까지 기획 아이템 세 개를 개발할 것이다.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운전은 기사가 해 주고, 청소는 메이드가 해 주는 이 편한 인도에서 나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시간을 잔뜩 얻었다. 1년 반 동안 열심히 한다면 뭐라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나에게는 고 3 입시 공부의 추진력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운동도 다시 시작할 것이다. 마음은 고 3인데 몸은 고 3이 아니니까. 글 쓰려면 오래 앉아 있어야 하니 체력 필수다. 당장 오늘부터 시작할 테다.


먹을 것도 좀 더 건강하게 챙겨 먹으려고 한다. 인도에서 돌아온 날 장을 보러 오랜만에 동네 마트에 갔다가 돼지고기 생고기를 팔고 있는 걸 봤다. 채식주의자들 가득하고 고기라고는 닭고기 밖에 안 먹는 이곳 인도에서 냉장 돼지고기를 판다는 건 정말 혁명과도 같다! 물론 나는 그 고기를 사 먹지는 않겠지만 (한돈 아닌 돼지고기는 냄새가 엄청나게 난다), 인도 식생활이 빛의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와 위안을 느끼며 가족들에게 건강한 밥을 해 주기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 못 구하는 것과 안 구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돼지고기, 소고기 다 구할 수 있으니 무엇이 두려우랴. 게다가 여름 내내 못 먹었던 망고가 아직도 시즌이 끝나지 않았다. 인도 생활 최고(?) 호사 망고를 남은 여름 동안 즐길 것이다.


오늘 아이의 개학 기념으로 하루 종일 집에 틀어 박혀 안 나가고 내 시간을 즐기려고 하는데. 문득 23년 3월이 떠오른다. 한국에서 배편으로 아직 짐이 도착하지 않았고, 어딘지 모르게 항상 냄새가 나는 인도 공기가 들어 찬 텅 빈 집에서 시간이 안 가 당황스러웠던 그때. 미련 없이 회사를 때려치우고 온 것을 엄청나게 후회했다. 21일이 되어도 아무 소식 없는 계좌를 보며 내가 진짜 너무 큰걸 포기했구나 싶었다. 지금은 확실히 안다. 월급을 포기한 대신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는 것을.


이 모든 거창한(?) 계획들은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머릿속으로 늘 생각하던 것들이지만, 내 집 내 책상 안에 앉으니 비로소 분명해지고 명확해졌다. 역시, 내 물건이 있는 곳이어야 생각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다. 이제 실천만 하면 된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를 하루하루 즐기면서 귀하게 살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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