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면
to one person
아무래도 L씨에게는(이후로는 당신이라고 호칭하겠습니다) 설명을 더 해야 할 거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L씨가 다시 물어오면, 어쩌면 안 물을 지도 모르겠지만, 대답을 해도 될까요?”
Y씨가 나에게 물어온 질문입니다.
“진실을 알고도 침묵을 하기는 어려울 테니 말하셔도 됩니다.”
Y씨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당신에게 내가 직접 말을 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당신이 이미 알고 있다하더라도 간접적으로 전해 듣는 것은 또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겠어서 설명을 더 하기로 결정을 한 거지요.
어제 일은 어제에게 맡기고 오늘을 충실하고 행복하게 살겠다는 사람도 있고(이번 여행을 함께 한 R언니의 삶의 자세), 어제 겪은 일의 상처를 흘려보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사람도(나) 있습니다. 사람마다 제각각 삶을 대하는 자세와 방법이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요, 나는 여전히 아프고 앓고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없이 나에게 모멸감을 준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런 상황이 억울하고 분하기도 합니다.
당신이 나에게 베푼 한 끼의 식사를 감사히 받아들였습니다. 부담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선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 정도는 갖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꼬이지 않았다는 부연설명입니다.
내가 다섯 명에게 나눠준 자석 기념품은 5불짜리(지금 기억하는 금액입니다), 당신이 지불한 음식값과는 비교되지 않을 적은 금액입니다. 옵션여행을 떠난 일행들과 떨어져서 혼자 여유시간을 보내던 중에 산 물건이고, 내 나름의 성의표시였습니다. 기억 하시나요? 기념품을 받은 당신이 내게 보였던 반응을요.
이런 거 말고 먹을 것을 사달라고 하셨어요. 이 정도는 귀여운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갖고 다니기 불편하다는 말도, 당신의 냉장고 앞면은 자석이 붙지 않는다는 말도, 자석을 붙이면 전기소모가 크다는 말까지 하셨습니다. 전기소모 문제는 다시 검색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당신이 베푼 음식에, 이런 부담은 싫으니 나는 따로 먹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다면 당신 마음이 어땠을까요? 식탁 분위기는 또 어떻게 변했을까요? 이왕 얻어먹었다는 소리를 들을 바엔 좀더 고급진 음식을 먹겠다고 했다면 당신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당신이 제공한 음식에 모두 감사했듯이, 당신 역시 상대의 선물에 거짓 감사라도 해야했습니다. 최소한 내키지 않는 마음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왜 도마를 샀는지 아십니까? 코스타리칸 나무로 만든 도마의 가치(적어도 나에게는)를 아십니까?
내가 산 도마의 무게를 아십니까? 도마가 무거우니 당신에게 들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까? 돈을 빌려달라고 했습니까?
여행지에서 기념품을 사지 않는 것은 당신의 취향이지만 기념품을 사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조롱할 자격이 당신에게는 없습니다. 누군가가 기념품을 사지 않는 당신을 비판하고 놀리면 당신 기분이 어떨 거 같습니까? 각각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내가 왜 노트북을 들고 여행을 갔는지 아십니까? 이게 당신의 조롱을 들을 일입니까?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고 변명하실 수 있습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서양속담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이번 여행이 좋기만 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여행에서 이런 수모와 모멸감이 덤으로 얹혀질 것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식탁에서 성호를 긋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잠깐이지만 내 삶을 돌아다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한 끼의 식사 앞에서 감사를 느끼는 당신이 아름답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앞의 단톡에 올린 글에서 눈치 채셨겠지만, 한 톨의 곡식이 내 앞에 오기까지 흘린 땀을 기억하는 귀한 리추얼입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언어가 독의 씨앗이 되어 타인에게 치명상을 입힌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도 그에 못지 않게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예를 들겠습니다. 당신이 등에 지고 다니던 가방은 토리버치입니다.
이것이 당신에게 유일한 명품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누군가 그건 명품급의 물건이 아니라고 당신의 말꼬리를 잡았다면 당신 기분이 어땠을 거 같습니까?
명품의 기준도 그래요, 돈을 주고도 사기 어렵다는 샤넬도 나 같은 사람에게나 명품이지 천문학적인 금액의 수제 명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에게는 시시한 물건일 거라고 생각됩니다. 자신의 주관적인 기준을 상대방에게 들이대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뱉어내지 않고 속으로 시비하고 비평한다면 문제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면전에서 내 기준을 들이대어 면박하고 무안주는 행위입니다. 당신이 의도적으로 나를 상하게 하려고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나의 존재가, 당신이 아무런 의식 없이 함부로 대할 존재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슬픕니다.
혹시 영화 ‘밀양’을 보셨습니까?
주인공 전도연이 울부짖는 장면이 있습니다.
성폭행범으로부터 어린 딸을 잃은 전도연이 감옥으로 죄수(범인)를 찾아갑니다.
용서를 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찾아갔는데 막상 가서 보니 죄수가 종교에 귀의해서,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를 받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때 전도연의 처절한 분노에 공감을 했었습니다. 내가 주변에 흔히 널린 종교 하나를 붙들지 못하고 무종교인으로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으로 인해 아프고 힘든 사람들에 대한 잘못을 종교행위를 빌어 면죄부를 받는 이율배반적인 행위에 혐오감을 느낍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크고 작은 ‘결핍’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의 각각 다른 결핍이 불러온 이 어긋남이 슬프도록 아픕니다. 오래 갈 것 같습니다.
부디 앞으로는 나에게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그리고 당신에게도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