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인 부분만 모아서 휘황찬란하게 묘사하는 것과 슬픔조차 허용되지 않는 투쟁과 같은 고통 중에 어느 것이 사실인지를 알아맞춰 보라는 대사로 막을 맺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가 문득 떠올랐다.
사실 직업적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한 터전을 옮겨가면서 외국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예전 직장의 컨텐츠를 워낙 좋아했고 당연스럽게 내 일부처럼 생각을 해왔기에 그 속에서 내 비전을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폐쇄적인 환경이 처음부터 보여주듯 왠만한 가식의 탈을 쓰지 않고는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던 곳이었다. 결국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그냥 나답게 살 수 있는 삶을 살다보면 행복하고 그러면 일도 더 잘풀리고 그렇지 않겠나 싶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다시 접다가 그러다가 다시 올라온 공고문을 보고 회사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별로 공을 드리지도 않고 원서를 보냈고 기다렸다는듯 일사천리로 일은 진행되고 나의 미국행이 결정되었다.
예전 회사의 복지 혜택인 건강검진을 하고 미뤄왔던 수술을 결심했다.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스트레스 조절 기관에 큰 혹이 생겼었던 것 같고 그동안 나에게 잘해주지도 못한 그 회사에서 요만한 기회가 있을 때 못잡을까봐 10센티가 넘게 커질때까지 손도 안대고 쉬쉬했고 결국 퇴직 후에 수술을 했다. 혹이 너무 커서 복강경이 가능할지 고민된다는 분야 최고의 권위자의 아침 첫 수술로 내수술이 잡혔고 수술전날 나는 어딘지 공포에 사로잡혔고 억울함에 성질이 포악해지기도 하고 낮에 먹은 샌드위치에 체했는데 간호사가 제산제를 처방해줘서 더욱 소화도 안되는 최악의 컨디션으로 수술에 들어갔다. 생각해보면 체했다기 보다 몸이 이미 무슨일이 있을 줄 알고 음식을 거부하는 것인 증상이었다.
수술대 위에 올라가고 깨어나는 전반적인 과정은 원치 않게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한 나에게는 차라리 편안한 휴식처럼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원하는 일이 이루어 지지 않고 삶에 진전이 없는 것은 늘 나의 노력 부족팃이라 생각하여 별 이유가 없는 한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수술 후 조직검사로 결과를 받기 전 까지는 또 마음껏 슬퍼해도 되고 마음껏 축 쳐져도 된다는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데 힘이 되라고 희망적인 음악만 들었었는데 평소에 안듣던 슬픈감정의 음악도 들었다. 일반적인 복강경 보다 훨씬 큰 납작한 수술 상처가 생겼고 수술용 테잎을 붙이고 씻을 땐 방수 필름도 붙여야 하는 상태였다. 적어도 수술후2주 후 비행기를 타야 할 것 같아서 금요일 도착이 아닌 월요일 도착으로 해도 되냐고 새로운 회사에 문의하니 이유는 말안하고 금요일 그것도 오전에 오라고 하여 부산에서 내항기를 타고 인천에서 거의 종일을 기다려 도착했다. 도착하니 나를 뽑은 분들은 높은 사람이 와서 의전을 하러 갔다그러고 그 후로도 일주일간 못만났는데 그냥 짜증나서 일찍오라고 지시했다는 것 뿐이고 오전에 오라 한 이유는 나를 마중하러온 총무부 직원들의 편의 때문이었다. 너무 별이유 아닌 것이 고분고분했다. 매일 씻을때마다 방수테잎을 붙이고 떼는 아픔을 겪고 5kg이상은 들지 말라고 했는데 무거운 이민 가방을 끌고 일주일간 호텔을 3군데를 옮겼다. 도시에 열린 대규모 컨퍼런스로 2성급 호텔도 1박 천달러를 기록하는 주간이었고 회사측은 에어비엔비는 안되니 알아서 일박 150에 해결하라 라는 단답이 끝이었다.
첫 호텔 하얏트 리젠시는 좋았다. 컨퍼런스 때문에 짐 맡기는 문제가 매끄럽지 않아 메일로 항의를 하니 1박에 해당하는 5천 포인트도 받았다. 중간 한 며칠은 영화에 나오는 손으로 문여는 엘레베이터가 있는 2성급 호텔에서 그럭저럭 지내다가 그래도 다시 피셔맨스와프의 쾌적한 호텔에서 마무리 할 수 있었고 아직 맡겨진 일도 없는데 근무시간에는 눈치를 보느라 매일 밤 집을 보러 다녔다. 생각해보면 행운의 연속 혹은 필연의 연속이었다. 한날은 오션비치 지역의 집을 보고 오는길에 구글맵을 보고 버스정류장을 찾아갔는데 도보 10분이 거의 낭떠러지 수준의 언덕을 올라가는 곳이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너무 힘들게 올라가서 파카 안에서는 땀이 나고 수술부위가 다칠까봐 복대를 감고 언덕을 올라서 서해안의 거친 파도와 절벽아래 그저 모래성 같은 집들을, 숨이 차지만 어쨌든 다른 환경에서 전혀 모를 미래를 위해 혼자 분투하는 나를 보며 아무런 약속이 없었지만 무한히 자유롭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힘든 산을 넘어왔는데 무슨일이든 못하겠나 싶었다.
수술 직후라서 인지 죽같은 유동식이나 스프같은 음식을 먹어가며 빨리 집을 구해서 요리를 할 수 있게되면 편하게 만들어 먹자는 생각을 했다. 이런 고생동안 회사에서는 인사치례도 없는 분위기였다. 워낙 그런 곳이다.
첫 해의 수확은 코로나 때문에 비싼 아파트에 높은 렌트를 내던 고소득자들이 도시를 빠져나가 도시 최고의 아파트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쉐어에 살때 좀 말도 안되는 일이 몇 번 있었는데 미련없이 싹 정리를 하니 일이 더 잘풀렸다.
두번째 해는 이 도시에서 나의 스타일을 찾고자 했다. 처음에 같이 다니다 기본 인성에 문제가 많고 같이 다니면 기분이 나빠지는 인간을 제끼고 나니 또 다른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나를 현혹한 혹은 나의 헝그리 하트에 너무 쉽게 침입한 조우는 결론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뭔가를 보여줄 의향이 없는 사람에게 정성을 쏟는 것은 얼마나 맥빠지는 일인가. 그 대상이 선하든 악하든. 그렇기 때문에 잠시 마음이 들떴던 때에도 뭔가 나에게 충실하지 못했고 내관리가 부족했다. 혼란을 지우고 단식에 가까운 식이를 연말연시에 하고나니 조금씩 다시 나의 활동성을 찾는 것 같다.
처음부터 잘해왔듯이 내 마음과 느낌에 무엇보다 솔직해야 한다. 그것만이 옳은 방향이다.
마우이에 사는 친구가 찍은 일상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