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자에 담긴 러브레터

by 김주영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나는 대학생이었다. 내가 다녔던 대학은 2학년까지 기숙사 생활이 의무였다. 1학년은 4인실을 사용했는데, 개인마다 책상과 옷장 침대가 제공됐다. 그리고 공용 비품으로 스테인리스 주전자와 쟁반이 있었다.


기숙사는 남녀 동이 따로 있었는데, 예외적으로 1학년 1학기 때는 남녀가 같은 동을 사용했다. 그 기숙사는 5층 건물이었는데 위층은 여자가 아래층은 남자가 사용했다. 학업이 끝나고 기숙사에 어둠이 내리면, 한창 에로스로 들끓을 대학생들은, 호감 가는 이성에게 마음을 전달할 방법을 찾느라 분주했었다. 그 에너지는 캠퍼스의 밤을 활기로 채웠다.


어느 날 밤이었다. 동아리 모임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길가의 가로등과 기숙사 창가에서 내비치는 불빛만이 캠퍼스의 어둠을 밝혔다. 그때 내 앞에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기숙사의 빨간 벽돌을 따라 아래쪽으로 둥그런 물체가 가로등 빛을 반사하며 내려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주전자였다. 줄에 매달린 주전자가 마치 거미줄을 타듯 리듬 있게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주전자 통신’이구나.


주전자 통신은 서로 사귀거나 썸을 타는 남녀가 주전자 안에 쪽지나 선물, 간식 등을 넣어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위층에서 주전자에 쪽지를 넣어 아래층에 내려보내면, 아래층에서 답장을 담아 다시 위층으로 올려 보냈다. 마치 제비 다리에 쪽지를 묶어 전황을 전달하던, 이제는 사라진 태곳적 지혜를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때로 주전자는 위층과 아래층 사이에 단체 미팅할 수 있는 중매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없어도 그 시절 대학생들은 주전자를 이용해 마음을 전했다. 지금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연결될 수 있다. 내가 ‘주전자 통신’을 하던 그때가 떠오른 건 그 간절함의 정서가 떠올라서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불편한 만큼 정성이 빛나서 그렇다. 마음을 전하는 일이 번거로울수록, 그만큼 진심이 빛났던 것 같다. 쉽고 편할수록 깨닫는 삶의 이치는 오히려 적을지 모른다.




기숙사 1층 현관에는 우편함이 줄지어 있었다. 이곳 역시 러브레터의 경유지였다. 호실마다 편지가 얼마나 꽂혀 있는지가 인기의 척도였다. 물론, 나도… 한 번 받은 적이 있었다. 모르는 여학생이었다. 비닐봉지에 빵과 함께 데이트 신청 쪽지가 들어 있었다. 당시 나의 관심은 연애보다 데모에 있었지만, 데이트를 주선했던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그녀와 함께 시내로 나가 영화를 봤다. 장국영이 나오는 홍콩 영화였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인생 첫 데이트였는지도 모른다.


이제 인터넷이 없으면 생활을 영위하기 힘든 세상이다. 제 용도를 벗어난 주전자의 쓰임이 아련한 기억으로 희미하지만, 그때 그 간절한 느낌은 계속 간직하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