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살고 있는 걸까 나는?’ 애초에 ‘이렇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이란 기준점이 없어서 무엇이 잘 사는 상태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어떻게 살겠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내게는 없었다.
“그런 패배주의적인 태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언젠가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 뭐라도 악착같이 달려들어서 이기고 성공하겠다는 자신감이라고는 없으니 글러 먹었다는 선고였다.
어떻게든 상위권 대학에 갔었어야 했다. 편입 시험에 합격했었어야 했다. 성적표를 A로 도배했었어야 했다.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었어야 했다. 그도 아니면 자랑스러운 금융 공기업에 입사했었어야 했다. 내향적인 성격도 진작 갖다 버렸어야 했다. 결혼도 진작 했었어야 했다. 자신감이 폭발하면서도 엄격하고 근엄한 삶의 자세를 지녀야 했다.
이 중에 어느 것도 기대에 부응한 게 없다. 꼭 이렇게 살아야만 인정받을 수 있고 그래야만 괜찮은 인생이라는 게 이미 정해져 있다면, 왜 반드시 ‘내’가 이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부모의 인정을 받아야만 성공한 인생이라는 세계관을 수락하고 싶지 않았다.
‘잘 산다는 건 뭘까?’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걸까 나는?’ 정해진 길을 따라 살아야만 한다는 강요의 족쇄를 벗어도 당황스럽다. 한 번은 아버지가 물었다. 돈 버는 문제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면 무슨 일을 하고 싶으냐고. 정말이지 어려웠다.
하루하루 회사에 다니면서 암중모색하는 사람에게는 사치스러운 질문이었다. 다른 대답이 떠오른다 한들 듣는 아버지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해야 할 뒷감당이 두려웠다. 사지선다 보기라도 달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민하다가 그냥 잘 모르겠다고 답했더니, 이번에는 꿈이 없다고 혼났다. 이럴 수가. 30대 중후반 직장인도 꿈이 있어야 한다니.
악바리처럼 굴고, 헝그리 정신으로 원하는 걸 쟁취하는 승리 지상주의적 삶의 태도는 무엇인가. 사회의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꿈이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꼭 있어야 하나? 있는 그대로 속내를 밝힐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다. 어떤 대답을 하든지 결국 듣는 사람의 심사평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회피하고 싶다. 그래, 다른 건 모르겠고 도망치고 싶다.
‘이 정도면 괜찮다.’ ‘별로다.’라는 타인의 판정, 남의 기준을 바탕으로 한 옳고 그름,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듦 또는 탐탁지 않음. 인생의 저울질을 예상할 때마다 가만히 멈춰있는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위아래로 움직일 때처럼 불안하다. 내가 버튼을 누른 게 아니라서 어디까지 내려가고 올라갈지 알 수 없는 걱정스러운 감각이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 ‘잘 사는 삶이란 뭘까?’ ‘내가 바라는 삶은 뭘까?’ 대답이 두려워 피하기만 하다 보니 이제는 자신에게조차 본심을 숨긴다. 이렇게 자신을 동동 싸매고 감춘 채로 회사만 열심히 다니다가 도망칠 방향도 감을 못 잡는 상황이 올까 봐 제일로 두렵다.
(이미지 출처 : Jo Zimny Photos, flickr, CC BY-NC-ND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