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 5천만원의 무게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한민국에서 '전세'라는 단어는 이제 역사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말이 되었다. 재판이 끝난 후, 지우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싸움은 끝났지만, 세상 어딘가에서 또 다른 지우의 싸움이 시작되고 있음을. 그는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주거권 지킴이'라는 작은 시민단체의 사무국장이 되어 있었다.
단기 폭락했던 집값은 현금 부자들과 거대 자본의 손에 넘어가, 이제는 소수의 임대 사업자들이 월세 시장을 장악한 시대가 되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소득의 절반 이상을 월세로 내며 하루하루를 버썼다. 가끔 배달 라이더가 되었다는 민혁의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무너진 신기루 위를 떠도는 유령이었다.
어느 늦은 밤, 겨울의 찬 기운이 스며드는 낡은 창틀 아래, 오래된 서류와 값싼 믹스커피가 뒤섞인 냄새가 나는 사무실에서 마지막 상담을 마치고 지우는 밖으로 나섰다. 책상 위 밀린 고지서들을 애써 외면한 참이었다. 복도 끝 어둠 속에서,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젊은 부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지우가 몇 년 전 느꼈던 것과 똑같은, 세상에 홀로 내버려진 듯한 절망과 불안이 서려 있었다. 아이의 작은 손에는 삐뚤빼뚤한 크레파스 그림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여러 색깔 지붕을 가진, 아이가 꿈꾸는 '집' 그림이었다.
"저기… 상담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집주인이 파산해서 보증금을 한 푼도 못 돌려받았는데… 당장 다음 달 월세 낼 돈도 없어서요. 아이는 곧 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지우는 자신의 피로를 삼키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잠갔던 사무실 문을 다시 열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두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입구 옆 스위치를 눌러 스탠드 조명 하나를 켰다. 어둠을 밀어내며 번진 작은 불빛이 상담 테이블 위를 따뜻하게 비췄다.
"들어오세요. 많이 추웠죠.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될 겁니다."
부부가 테이블에 앉자 지우는 시선을 사무실 한쪽으로 돌렸다. 낡은 화분 하나가 보였다. 몇 년 전 새집에 가져갔던 행운목이었다. 잎사귀는 예전처럼 무성하지 않았지만, 앙상한 줄기 끝에서 작은 새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 옆에는 한참 동안 잠들어 있던 솜이가 부스스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지우가 아이에게 미소 짓자, 아이는 수줍게 다가와 손에 든 그림을 보여주었다.
"이건요, 우리 고양이 '나비' 방이에요."
아이는 그림 속 작은 네모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순간, 지우는 아주 오래전, 솜이가 햇살 아래 뛰어놀 공간을 상상하며 행복해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이의 그림 속, 여러 색깔 지붕을 가진 집을 보며 지우는 생각했다. 자신의 잃어버린 집을 되찾을 수는 없겠지만, 세상 모든 지우들을 위한 작은 안식처는 바로 이곳에서, 지금부터 시작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