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 움 Part12

나는 유령이었다.

by sarihana

12장. 집으로 가는 길


그날 밤, 나는 평소보다 훨씬 늦은 시간까지 병원에 남아 있었다. 하루의 마지막 환자를 돌보고, 서류를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병실의 불을 끄고 나오는 길. 로비에 울려 퍼지는 내 발걸음은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다. 이전에는 지쳐버린 몸과 마음을 이끌고 도망치듯 빠져나오던 이 공간이, 이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이곳은 더 이상 나를 옥죄던 고통의 장소가 아니었다. 나의 하루가, 나의 치열한 삶이, 그리고 내 친구 수현의 마지막이 고스란히 새겨진 삶의 터전처럼 느껴졌다. 자동문이 스르륵 열리며 서늘한 가을밤 공기가 뺨에 와 닿았다. 병원 특유의 짙은 소독약 냄새 대신, 부산 항구에서 불어오는 희미한 바다 내음이 섞여 있었다. 그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자, 내 안의 상처와 화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용기가 솟아올랐다.


집으로 향하는 길, 나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밤의 도시 풍경을 제대로 보았다. 그동안의 나는 마치 세상의 모든 무게를 짊어진 사람처럼 땅만 보고 걸었다. 세상의 모든 빛과 소리가 나를 향한 비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밤, 나는 길모퉁이 꽃집에 잠시 멈춰 서서 국화꽃 향기를 맡아보았다. 수년간 잊고 지냈던, 혹은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평범한 삶의 감각이었다. 따뜻한 김을 내뿜는 포장마차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 떡볶이 1인분을 샀다. 따끈한 온기가 담긴 검은 봉투를 손에 들자, 잊고 있던 소소한 행복감이 밀려왔다. 모두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 역시, 돌아갈 곳이 있었다. 나를 기다리는 아이가 있는, ‘집’이라는 이름의 안식처.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길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문을 열자, 병원의 날카로운 기계음과 소독약 냄새 대신, 집 안의 고요함과 아이의 비누 냄새, 저녁밥 냄새가 뒤섞인 따뜻한 공기가 나를 감쌌다. 나는 마침내 전쟁터에서 돌아온 것이다. 작은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다 소파에 잠든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텔레비전도 켜지 않은 채 웅크리고 잠든 그 작은 몸을 보는 순간, 하루의 모든 긴장과 분노, 슬픔이 눈 녹듯 사라졌다.


아이의 작은 손에 스케치북이 쥐어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펼쳐보았다. 서툰 솜씨로 그린 엄마의 얼굴, 그리고 그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파란색 눈물방울.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 작은 아이가, 내가 모르는 사이 혼자서 내 슬픔을 전부 감당하고 있었구나.


나는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아 들었다. 잠에서 깬 아이가 부스스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작은 팔로 내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엄마…” “응, 우리 아가. 엄마 왔어. 늦어서 미안해.”


아이를 안고 침대에 눕히려는데, 아이가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혹시… 내가 맨날 말썽 피워서… 그래서 엄마가 맨날 아팠어? 수현 이모도 그래서…” 아이의 입에서 나온 수현의 이름에 나는 숨을 멈췄다. 병원이라는 담장 안에서 벌어진 폭력은, 담장을 넘어, 내 아이의 여린 마음까지 할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와 눈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앉아 아이의 작은 두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우리 아가는 엄마한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야. 우리 아가 때문에 엄마가 아팠던 게 아니라, 엄마랑 수현 이모가 일하는 병원에,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아주 나쁜 감기 바이러스가 퍼졌었어. 그 바이러스 때문에 수현 이모가 너무 아파서, 하늘나라에 있는 병원으로 먼저 간 거야. 엄마도 그 바이러스 때문에 잠시 길을 아주 잠깐 잃어버렸었어. 그런데 우리 아가 덕분에 다시 길을 찾은 거야. 엄마가 이제는 다른 친구들이 아프지 않도록 지켜주는, 아주 용감한 간호사가 되기로 약속했거든.”


내 말을 들은 아이가 안도하며 나를 꼭 껴안았다. "엄마, 이제 그 감기 바이러스 다 나은 거야?" 아이의 순수한 믿음이 담긴 질문에,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기어이 터뜨리고 말았다. 그것은 더 이상 슬픔이나 고통의 눈물이 아니었다. 내 마음속 길고 길었던 겨울을 녹이는 따뜻한 봄비 같은 눈물이었다. 지옥 같았던 시간을 견뎌내고, 마침내 내 아이 앞에서 온전히 바로 설 수 있게 되었다는 벅찬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었다. 나는 아이를 한참 동안 부서져라 끌어안았다.


아이를 재운 뒤, 나는 소파에 앉아 벗어둔 보라색 간호사 유니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희미한 땀 냄새와 소독약 냄새, 그리고 오늘 하루의 치열했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나는 손으로 유니폼을 부드럽게 펴서 옷걸이에 걸었다. 그것은 더 이상 나를 짓누르던 죄수복이 아니었다. 환자의 삶을 지키고, 내 아이의 미래를 책임지며, 내 친구 수현의 마지막 약속을 지켜낼 나의 갑옷. 그리고 그 갑옷은 이제, 상처 입었던 나 자신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법을 알려주는, 나의 가장 큰 방패이자 용기였다. 나는 더 이상 나를 방치하지 않겠다. 나를 지켜야, 다른 사람도 지킬 수 있다. 그날 밤, 나는 아주 오랜만에, 꿈에서 수현과 함께 웃었다. 교복을 입은 우리가 처음 간호사가 되기로 약속했던, 그날의 옥상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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