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령이었다.
에필로그
수현이 떠나고 스무 해 하고도 몇 번의 봄이 더 지났다. 나는 머리가 희끗해진 평범한 중년의 여인이 되었고, 투사라 불리던 시절은 낡은 앨범 속 사진처럼 아득해졌다. 아이는 훌쩍 자라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났고, 나는 아주 오랜만에 혼자가 되었다.
오늘, 나는 정기 검진을 위해 그 병원을 찾았다. 수많은 얼굴이 스쳐 지나가고 병원의 구조도 많이 바뀌었지만, 소독약과 사람의 온기가 뒤섞인 공기만은 그대로였다. 한때는 트라우마를 자극하던 그 냄새가, 이제는 낡은 사진첩의 향기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진료를 마치고, 나는 홀린 듯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가장 높은 층, 옥상으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던 순간, 심장이 잠시 내려앉았다. 한때는 지옥의 문이 열리는 소리 같았던 그 기계음이, 이제는 낡은 친구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옥상에 올라서자,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낡은 자판기가 보였다. 나는 동전을 넣고 뜨거운 커피를 뽑았다. 수십 년 전, 수현과 함께 희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커피를 마셨던 바로 그 자리. 여전히 부산의 밤바다는 우리의 두려움을 실어 날랐던 그 소금기 섞인 바람을 보내오고, 도시의 불빛은 변함없이 별처럼 반짝인다. 한때 모든 것이 재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이 공간에, 이제는 시간만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나는 난간에 기대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가장 오래된 친구에게 안부를 물었다.
'잘 지내니, 수현아. 나 왔어.'
'…세상은 우리가 꿈꾸던 천국이 되진 않았어. 여전히 아픈 사람도, 힘든 사람도 많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싸움이 계속되고 있겠지.'
'하지만 말이야. 이젠 혼자 우는 아이들은 많이 줄었을 거야. 넘어졌을 때, 차가운 질책 대신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들이 아주 조금은 더 많아졌을 거야. 우리가 그토록 바랐던 세상이 바로 그런 거 아니었을까.'
나는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비단 하얀 가운을 입은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유니폼 아래에서, 수많은 희진과 수현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싸움의 끝이 완전한 승리가 아닐지라도, 우리가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한, 세상은 아주 조금씩, 더 따뜻한 곳이 되어갈 것이라 믿는다.
나는 더 이상 과거의 악몽에 갇혀 있지 않다. 그 과거와 화해했다. 친구의 죽음을 딛고, 그녀의 몫까지 살아내며, 우리가 함께 꾸었던 꿈을 지켜낸 것. 그것이 내가 그녀를 영원히 기억하는 방식이다.
옥상 문을 열고 다시 세상으로 향했다. 나의 걸음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싸움은 끝났고, 나는 모든 것을 이겨냈다.
자판기 커피는 여전히 썼지만, 그날따라 참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