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 움 Part28

by sarihana

28장. 빗속의 씨앗


나의 폭탄선언 이후, 또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위원회는 동력을 잃고 해체되었고, 나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평범한 간호사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세상은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나의 '빈 의자'는 진정성을 갈망하던 시민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고, '수현 연대'는 한 차례 큰 홍역을 겪은 뒤 더 단단하고 현장 중심적인 조직으로 재편되었다.


나는 대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한때 나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했던 강유미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것은 나의 시대가 끝났음을 인정하는 패배 선언이 아니었다. 새로운 세대의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나의 방식이었다. 이제 나는 조직의 최전선이 아닌 가장 낮은 곳에서, 갓 간호사가 된, 혹은 활동가를 꿈꾸는 어린 후배들을 가르치고 상담하는 멘토가 되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오후, 나는 작은 사무실 창가에 서서 스터디에 열중하고 있는 후배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병원 관리자와의 협상을 앞두고, 열정적으로 모의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한 후배가 과거의 나나 수현이 겪었던 부당한 업무 지시에 대한 사례를 발표했다. 하지만 그녀는 울거나 분노하는 대신, 차분하고 논리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 경우, 근로기준법 제50조와 개정된 간호인력법 3항을 근거로 공식적인 문제 제기가 가능합니다. 증거 자료는 이렇게 확보해야 하고요."


그들의 눈은 빛났고, 목소리는 활기로 가득했다. 내가 감정과 눈물로 싸워야 했던 길 위에서, 이 아이들은 법과 논리라는 더 단단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십수 년 전, 수현의 죽음 이후 모든 것이 재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내 삶에, 이렇게나 싱그럽고 튼튼한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내가 거대한 폭풍을 막는 위태로운 우산이었다면, 이제 나는 다음 세대의 나무들이 자랄 수 있도록 땅을 일구고 씨앗을 심는 사람이 된 것이다.


얼마 전에는 민지 선배가 사무실에 쑥스럽게 웃으며 찾아왔었다. 그녀는 이제 병원의 신규 간호사 교육을 총괄하는 책임자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교육 자료를 내밀며 말했다. "내가 괴물이 되어서 후배들을 괴롭혔던 그 방식, 다시는 이 병원에 발 못 붙이게 하는 게, 내가 수현이에게, 그리고 너에게 속죄하는 길인 것 같아서. 한번 봐줄래? 부족한 거 없는지." 그녀의 자료집 첫 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는 동료의 눈물을 닦아주는 간호사가 된다.'


지나는 이제 누구보다 강한 투사가 되어 병원 노동조합을 이끌고 있었고, 묵묵히 우리 곁을 지켜주던 지은 선배는 모두의 신임 속에서 우리들의 옛 병동 수간호사가 되어, 우리가 그토록 꿈꾸던 '따뜻한 섬'을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가끔 사무실 후원 내역을 볼 때면, 'P'라는 이니셜로 거액을 보내오는 익명의 후원자가 있었다. 나는 그것이 여전히 병원에서 냉소적인 표정으로 환자를 돌보고 있을 박진우 선생이라는 것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훌쩍 커버린 대학생 아들이 쭈뼛거리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내가 좋아하는 따뜻한 카페라테 두 잔이 들려 있었다.


"엄마, 바쁘신데… 잠시 들렀어요."


아들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내게 커피를 건넸다. 그리고는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오늘 학교에서 사회 문제 토론했는데… 엄마가 바꾼 간호사 인권법 얘기가 나왔어요. 친구들이 다들 대단하다고…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렸나 봐요. 엄마가 얼마나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지 몰랐어요. 죄송해요. 그리고… 자랑스러워요, 엄마."


아들의 담담한 고백에,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사회를 바꾸기 위한 싸움 속에서, 어쩌면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내 마음 한구석에 있었다. 아들의 한마디는 그 모든 불안과 상처를 눈 녹듯 사라지게 만들었다. 내 영혼에 박혀 있던 마지막 가시가 뽑혀나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사회적으로 얻은 그 어떤 명성보다도 더 큰 위로와 구원이었다. 나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아들이 돌아가고 난 뒤, 한 후배가 다가와 내게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새로 건네며 물었다.


"선배님, 후회하지 않으세요?"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는 여전히 거칠게 내리고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했지만, 이제 젖은 땅 곳곳에서는 튼튼한 새싹들이 빗물을 머금고 힘차게 돋아나고 있었다. 그들의 작은 어깨는 내가 한때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내 인생 처음으로 온전한 평화가 깃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단 한 순간도."


마음속으로 수현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보고 있니, 수현아. 이제는 비가 와도 괜찮아. 우리가 함께 숲이 될 테니까.'


나의 외로운 싸움은 끝났지만, 우리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끝에는 언제나 희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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