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를 하오 Part12

다시 피어나는 장미

by sarihana

제3부. 상처 입은 자들의 연대

제12장. 연필 한 자루가 건넨 위로


그날 밤의 통곡 이후, 장미의 시간은 다르게 흘렀다. 병실은 여전히 차가운 소독약 냄새로 가득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마치 거대한 폭풍우가 할퀴고 간 뒤의 고요함, 모든 것이 부서지고 남은 폐허 위에 내리는 새벽이슬처럼 처연한 평화에 잠겨 있었다. '살아내겠다'는 결심은 뜨거운 열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스스로에게 갱신해야 하는, 차갑고 묵직한 책임감에 가까웠다.


그 약속은 낭만적인 다짐이 아닌, 매일의 작은 투쟁으로 증명되어야 했다. 그것은 모래알을 씹는 듯한 맛없는 병원 밥을, 약이라 생각하며 억지로 삼키는 일이었다. 링거대를 지팡이 삼아 하루에 열 걸음이라도 더 걷기 위해 비틀거리는 일이기도 했다. 오전 재활치료실은 저마다의 고통과 싸우는 이들의 나직한 신음과 쇠 냄새 나는 땀으로 가득했다. 장미는 차가운 금속으로 된 평행봉을 잡고 일어섰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후들거리는 다리에 온 신경을 집중해 힘을 주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땀으로 흠뻑 젖어 병실로 돌아오는 길, 그녀는 지쳐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어제보다 다섯 걸음을 더 걸었다는 사실에 희미하지만 단단한 만족감을 느꼈다.


어느 날 저녁, 병원 식당에서 고무처럼 질긴 떡과 밍밍한 국물로 이루어진 떡볶이를 현우와 나눠 먹다가,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이게 얼마 만에 먹는 떡볶이람.” 스스로도 놀랄 만큼 평범하고 가벼운 웃음이었다. 오랫동안 녹슬어 있던 경첩이 마침내 기름칠을 한 듯 삐걱거리며 열리는 소리 같았다. 그 씁쓸하면서도 다정한 웃음의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날, 현우는 낡은 스케치북과 뭉툭하지만 단단하게 깎인 4B 연필 한 자루를 내밀었다.


“…누나 디자이너라고 들었어요. 때로는 말보다 그림이 더 많은 걸 담아내기도 하니까. 심심할 때 뭐라도 그려요.”


장미는 한참 동안 새하얀 스케치북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녀가 잃어버린 세계로 돌아가는 단 하나의 열쇠이자, 동시에 판도라의 상자였다. 그것을 펼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가장 자신다웠던 과거의 영광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었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지금의 자신을 확인해야 하는 잔인한 일이기도 했다. 그것은 '환자' 장미가 아닌, '디자이너' 장미의 정체성을 되찾아줄 소중한 선물이자, 감당하기 힘든 시험대였다.


밤이 깊어 모두가 잠든 시간, 병원의 모든 소음이 낮은 진동으로 가라앉았을 때, 그녀는 마침내 결심한 듯 스케치북을 펼쳤다. 새하얀 종이가 마치 건너야 할 사막처럼 막막하게 느껴졌다. 떨리는 손으로 연필을 쥐고, 침대 옆 탁자 위의 투명한 물컵을 그리려 했다. 하지만 항암치료의 후유증으로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은 그녀의 의지를 배신했고, 초점을 잃고 왜곡된 시야는 사물의 형태를 정확하게 담아내지 못했다.


뇌는 완벽한 타원을 명령했지만, 손은 경련하듯 엇나가 지진계의 기록처럼 비틀린 선을 그었다. 곧게 뻗어야 할 직선은 격랑에 휩쓸린 난파선처럼 휘어지고 원근감은 사라진 채, 스케치북 위에는 비명을 지르는 듯한 끔찍한 괴물의 형상만 남았다. 이게 아니야. 내 손이 아니야. 내 눈이 아니야. 나는… 모든 걸 잃었어. 재능의 죽음. 차가운 절망감이 다시 한번 그녀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연필을 부러뜨릴 듯 꽉 쥐었던 그녀는, 문득 지혜의 얼굴을 떠올렸다. '살아내겠다'는 약속. 그녀는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래, 나는 또다시 완벽한 그림을 그려서 '이겨내려' 하고 있었구나. 하지만 나의 약속은 그게 아니었지. 나의 약속은 완벽한 디자이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었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더 이상 똑바로 그리려 애쓰지 않았다. 대신, 일그러진 선이 이끄는 대로, 떨리는 손끝이 움직이는 대로 연필을 종이 위에 내맡겼다. 그것은 더 이상 사물을 베끼는 행위가 아니었다. 자신의 내면을, 응어리진 분노와 슬픔,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다는 생의 감각을 토해내는 몸부림이었다. 연필심이 종이를 긁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그녀의 심장 소리처럼 거칠게 울렸다.


스케치북 한 페이지가 온통 검고 격렬한 선들로 가득 찼다. 그것은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었다. 상처의 지도였고, 영혼의 지진계였다. 하지만 그 정직한 혼돈 속에서,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살아있음을 느꼈다. 과거의 재능은 죽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폐허 위에서, 그녀의 새로운 시작이, 가장 진실한 첫 번째 선을 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