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기억
그로부터 1년 뒤, 가을.
최진혁은 국립묘지 한편, 권도윤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비석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국화 대신, 새하얀 치자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그 끔찍했던 재판이 끝나고 처음이었다. 그의 옆에는, 이제 더 이상 변호사 명함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박수진이 함께 서 있었다.
"결국 우리가 이긴 걸까요?"
박수진의 나직한 물음에 최진혁은 대답 대신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 우린 이기지 못했어. 김민석은 마지막까지 우리 모두를 자신의 연극 무대 위에 세웠고, 스스로 막을 내렸을 뿐이야. 우리는 그저 그의 마지막 관객이었던 거고."
김민석은 권도윤의 옛 사무실에서 투신한 뒤,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법적으로는 실종 처리되었지만, 모두가 그의 죽음을 확신했다. 그의 완벽주의적 성격상, 실패한 작품으로 세상에 남겨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을 터였다.
두 사람은 권도윤의 비석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1편의 마지막, 권도윤의 죽음은 김민석의 완벽한 예술 행위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안다. 그 죽음은 예술이 아니라, 한 인간의 영혼을 파괴시킨 대가로 김민석 스스로를 파멸로 이끈, 비극적인 서막이었음을.
"그가 옳았어요." 박수진이 말했다. "권도윤 선배님은… 김민석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어요. 그가 단순한 악마가 아니라, 자신의 논리로 세상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 같은 존재라는 걸요."
최진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책상 서랍에는 '정원사' 김민석의 '망상 기록'과 그가 자신에게 보낸 '서신'들의 사본이 봉인되어 있었다. 세상에 공개되어서는 안 될, 가장 위험한 유산이었다.
그가 자리를 떠나려 할 때, 주머니 속에서 전화기가 울렸다. 현장감식팀 팀장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6년 전 그날처럼 다급했다.
"부장님, 신도시 공사 현장에서 변사체가 발견됐습니다. 부패한 건설사 대표입니다."
최진혁은 피곤한 눈을 감으며 물었다. "특이사항은?"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내, 망설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시그니처는 없습니다. 꽃 같은 건 없어요. 다만… 현장 벽에 스프레이로 휘갈겨 쓴 글씨가 하나 남아있습니다."
"..."
"'잡초를 뽑았을 뿐이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최진혁은 눈을 떴다. 그의 눈에 다시, 지독한 싸움을 앞둔 검사의 불꽃이 타올랐다. 그는 옆에 선 박수진을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 침착하지만 단호한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정원사' 김민석은 사라졌지만, 그가 세상에 풀어놓은 광기와 사상은 죽지 않고 새로운 씨앗이 되었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다른 얼굴로, 다른 계절에 우리를 찾아올 뿐이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