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 사회 (확장판) 프롤로그

마지막 기록자

by sarihana

서문


이 기록을 읽는 당신에게.


이것은 영웅이나 악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거대한 재앙이나 위대한 승리의 연대기 또한 아니다. 이 글은 한때 세상에서 가장 역동적이었던 한 나라가 어떻게 스스로 침묵의 시대로 걸어 들어갔는지에 대한, 너무 늦어버린 해부의 기록이다. 기억이란 주관적이고 불완전한 것이기에, 나는 오직 내가 보고 느낀 사실과 감정의 파편들을 긁어모아 이 글을 엮었다.


우리는 2025년의 아우성 속에서 2050년의 정적을 보지 못했다. 수많은 경고음이 사이렌처럼 울렸지만, 우리는 그 소음이 지겹다며 귀를 막은 채 서로를 탓하기에 바빴다. 이 이야기는 그 시절 우리가 외면했던 수많은 질문들이 어떻게 거대한 청구서가 되어 우리 세대의 어깨를 짓누르게 되었는지를 증언한다. 나는 이 글을 쓰며, 거대한 비극은 언제나 사소한 외면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패배한 시대에도 기록은 필요하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디서부터 길을 잃었는지 알아야 다음 세대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며 깨달았다. 역사는 거대한 사건으로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의 침묵과 외면, 그리고 용기 내지 못했던 작은 선택들이 모여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것은 과거를 향한 나의 참회록이자, 혹시라도 존재할지 모를 다음 세대를 위한 나의 유서다. 부디 당신은,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우리가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들으며, 우리가 걷지 못했던 길을 걸어가기를.


2055년 겨울, sarihana





프롤로그: 잿빛 도시의 살인


2050년 9월 1일. 서울.


저녁이었다. 창밖은 예보대로 산성비를 머금은 인공 구름으로 자욱했고, 네온사인 대신 정부의 공익 광고 홀로그램이 빗방울에 흐릿하게 번졌다. 나는 차가운 영양 페이스트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며 홀로그램 TV 화면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금속성의 비릿한 맛과 약간의 단맛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생존을 위한 연료 주입. 정부가 제작한 국정 홍보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드론이 촬영한 유려한 화면 위로, 인공지능이 합성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정적인 사회, 존엄한 노후. 대한민국은 성공적으로 고령 사회에 연착륙했습니다.” 화면에는 최신식 의료 로봇의 보살핌을 받으며 미소 짓는 노인과, 깔끔한 공공 주거 공간에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청년의 모습이 교차했다. 완벽하게 연출된 평온함.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이 평온은 거대한 상실을 숨기기 위한 싸구려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마치 혀끝의 미뢰조차 기능하지 않는 것처럼, 나의 삶은 색을 잃은 지 오래였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2050년의 나는, 내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자주 잊었다.


그때, 홍보 영상이 끝나고 정규 뉴스가 시작되었다. 앵커는 방금 전 영상과는 사뭇 다른 굳은 표정으로 첫 소식을 전했다. ‘노인 대상 증오 범죄, 올 들어 최고치 경신. 세대 갈등, 위험 수위 도달.’


화면은 공원 벤치 주변에 그어진 폴리스 라인의 푸른빛과 붉은빛으로 바뀌었다. 희생자는 79세 노인, 박영수. 전직 교사. 가해자는 24세 청년, 이준우. 3년 차 드론 정비 기사. 둘 사이에는 어떤 개인적인 원한도, 금전적인 다툼도 없었다. 체포된 청년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마치 오래전부터 외워온 대사처럼 한마디만 반복했다고 한다. “그냥… 모든 게 지긋지긋해서.”


이것은 살인이 아니었다. 내가 25년 전부터 기록해왔던 모든 것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오랫동안 곪아 터진 이 사회의 환부가 마침내 가장 약한 곳에서 터져 나온 것일 뿐. 뉴스를 보는 동안 내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고,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나 역시 그 총구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것을. 마치 잊고 있던 통증이 다시 살아난 것처럼, 나의 무감각한 일상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뉴스 말미에 한 정부 관료가 나와 원론적인 답변을 늘어놓았다. “일부 극단적인 사례일 뿐입니다. 정부는 사회 통합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내 심장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산산조각 났다. '일부 극단적인 사례.' 등골을 타고 차가운 땀이 흘렀다. 이 비극의 공범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 침묵을 선택했던 나. 나는 더 이상 이 질서정연한 거짓말을 견딜 수 없었다. 기록자로서의 분노와 의무감이 내 안에서 들끓었다. 마치 오랜 시간 굳어 있던 붓을 다시 잡아야 하는 화가처럼, 나는 글을 써야만 했다.


나는 TV를 끄고 낡은 노트북을 열었다. 하얀 백지 위에서 커서가 무심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우리는 어쩌다 서로를 이토록 증오하게 되었는가. 이 끔찍한 침묵은,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나의 기록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 25년 전의 시끄러웠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나는 먼지 쌓인 상자 깊숙한 곳에 봉인해두었던 외장 하드를 꺼내 노트북에 연결했다. 화면 가득, 내가 외면했던 과거의 기록들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