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 사회 (확장판) - Part1

마지막 기록자

by sarihana

1부: 2025년의 기록, 외면했던 사이렌


나는 과거의 기록을 다시 펼쳤다. 그 시절의 내가 썼던 글과 글 사이에는, 우리가 외면했던 수많은 비명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나의 글이 펜 끝에서 멈춰버렸을 때, 역사는 이미 우리를 버리고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2025년 1월: 불합격 통지서의 제단


새해가 밝았지만 희망 대신 절망이 먼저 찾아왔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채 가시지 않은 아들의 방, 스탠드의 하얀 불빛 아래 수십 통의 불합격 통지서가 제단처럼 쌓여 있었다. 아들은 그 앞에 앉아 마우스를 무의미하게 클릭하며 한숨을 쉬었다. 새해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한숨이었다. 켜켜이 쌓인 서류 뭉치를 멍하니 바라보는 아들의 축 처진 어깨는, 스물다섯의 내가 거울 속에서 보았던 모습과 너무나 똑같아서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아빠, 다들 스펙이 장난 아니래. 토익 만점은 기본이고, 인턴 경험 없으면 서류도 안 본대. 자격증은 세 개 이상이 국룰이라나. 난 뭘 해도 안 될 것 같아. 그냥… 다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할까?"


아들의 목소리에는 분노보다 체념이 먼저 묻어 나왔다. 마치 정답이 정해진 게임에서 계속 패배하는 기분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아들이 사귀는 친구와 결혼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책상 한쪽에 놓인, 두 사람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흘깃 보며 아들이 툭 던지듯 말했다.


"결혼은 무슨 결혼. 당장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저축은커녕 학자금 대출 갚기도 벅찬데. 아이라도 낳으면 평생 이 가난 못 벗어날 텐데. 그냥 서로 좋아하는 지금이 제일 편할 것 같아. 솔직히, 아빠 세대는 우리보다 훨씬 쉬웠잖아."


아들의 마지막 말은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내 가슴에 박혔다. 그 눈빛은 단순한 원망이 아니었다. '아빠는 대체 우리에게 뭘 물려줬어? 왜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살게 놔뒀어?'라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IMF 외환위기의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청춘을 보냈다고, 우리 때도 죽을 만큼 힘들었다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공허한 변명처럼 느껴져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아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 세대에게는 '노력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희미한 믿음이라도 있었으니까.


우리는 '다음 세대'라는 거창한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정작 나의 불안과 절망을 아들에게 그대로 물려주고 있었다. 이 고통스러운 대물림은, 기성세대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다음 세대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잔인한 증거였다.


그날 밤, 나는 조심스럽게 아들의 방문을 열었다. "아들, 잠깐만… 아빠랑 같이 이력서 다시 써보자. 네가 어떤 면접에서 떨어졌는지, 서류에서 왜 자꾸 막히는지, 아빠가 가진 경험으로 같이…"


어떻게든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싶었다. 이 깊은 단절감 속에서 가느다란 연결고리라도 찾고 싶었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들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차갑게 말을 잘랐다.


"됐어, 아빠.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아빠가 해주는 건 옛날 방식이라 어차피 도움도 안 될 것 같아. 그냥… 그럴 돈 있으면 학원비나 더 보태주면 안 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들의 눈에는 더 이상 기대나 슬픔이 없었다. 그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앞에 둔 사람의 건조함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우리의 관계마저도 생존을 위한 거래가 되어버린 듯한 그 순간, 나는 방문을 조용히 닫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거실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나는 이 깊은 절망 또한 기록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 01화초고령 사회 (확장판) 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