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 길에서 만난 이혼 - Part15

깨진 조각의 무게

by sarihana

15장. 마주 선 길, 그리고 스쳐 가는 바람


전시회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몇 달이 지난 늦가을이었다. 혜진은 첫째 선우가 아르바이트하는 레스토랑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계산대를 지나 자동문이 스르륵 열리는데, 익숙하면서도 낯선 뒷모습과 마주쳤다. 전남편이었다. 그는 몇 년은 더 늙어 보였고, 한때 세상을 다 짊어진 듯 꼿꼿했던 어깨는 눈에 띄게 처져 있었다. 그의 카트에는 즉석밥과 냉동식품 몇 개가 덩그러니 담겨 있었다.


그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화들짝 놀란 듯 잠시 멈칫하더니,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예전 같았으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거나 묵은 분노가 치밀었을 테지만, 혜진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마치 산 정상에서 먼 풍경을 바라보듯, 한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먼저 가볍게 목례를 했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시죠?”


그는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대답했다. “어… 그냥. 당신은… 좋아 보이네.”


그의 시선이 혜진의 손에 들린 장바구니에 닿았다. 안에는 선우가 좋아하는 신선한 로즈마리 한 묶음과 둘째 지훈이 노래를 부르던 신제품 과자가 들어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마치 남의 아이들 안부를 묻는 사람처럼 물었다.


“애들은… 잘 지내?”


그의 떨리는 목소리는 어색했고, 그 짧은 침묵 속에서 혜진은 그의 묻지 못한 수만 가지 미안함과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의 거리를 동시에 느꼈다.


“네. 각자 자기 길을 아주 잘 찾아가고 있어요.”


혜진의 목소리에는 원망이나 자만이 아닌,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하는 담담함이 묻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듯했다. 짧은 침묵 끝에, 그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그래… 다행이네. 그럼, 잘 가.”


그렇게 그들은 반대 방향으로 스쳐 지나갔다. 혜진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 짧은 마주침은 그녀에게 마지막 확인과도 같았다. 그는 더 이상 그녀의 삶을 뒤흔드는 거대한 태풍이 아니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 한때 내 삶에 머물렀던 사람일 뿐이었다.


과거를 완전히 떠나보낸 그 주말, 혜진은 민우와 함께 붉게 물든 가을 산에 올랐다. 정상에 섰을 때, 민우가 건넨 따뜻한 차가 담긴 등산용 컵 표면에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그곳에는 이제 막 피어난 것 같은, 낯선 자신의 웃음이 있었다. 스무 살 시절처럼 화려하고 걱정 없는 미소는 아니었다. 눈가에는 슬픔이 지나간 흔적이 옅은 강물처럼, 입가에는 지독한 고독을 견뎌낸 힘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훨씬 단단하고, 깊고, 아름다운 빛을 담고 있는 미소였다.


그녀는 생각했다. ‘굴곡 없는 인생은 평탄하고 안전해 보이지만, 어쩌면 물이 흐르지 않는 고인 연못과 같을지도 모른다.’ 이혼은 끝이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게 한 또 다른 시작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실패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생의 가장 깊은 굴곡을 온몸으로 통과하며, 자신만의 지도를 그려낸 용감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올라온, 구불구불 이어진 등산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저 멀리, 정상을 지나 또 다른 능선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새로운 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옆에는 민우가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또 다른 굽이길이, 예상치 못한 비바람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 혜진의 미소는 지나온 모든 굴곡과 상처를 온전히 품어내는 지혜와 평온을 담고 있었다. 굴곡진 인생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예술 작품임을 온몸으로 깨달은 자의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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