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밸브
아키라는 지휘소 구석,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평생을 지탱해 온 단단했던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국가. 시스템. 매뉴얼. 그는 그것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딸 유나가 피아노 발표회에 제발 와달라고 울며 매달렸던 날에도 ‘긴급 점검’을 이유로 등을 돌렸고, 아내의 눈물을 애써 외면하며 인간적인 감정을 스스로 거세했다. 혼돈 속에서 오차 없는 질서를 유지하는 것만이,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을 포함한 모두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가 목숨 바쳐 충성했던 시스템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목숨과도 같은 딸을 버렸다. 아니, 딸에게 가려는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국가’라는 이름의 거대한 제단에 그를 산 제물로 바치려 하고 있었다. 이보다 더 잔인하고 완벽한 배신은 없었다.
그제야 그는 유진 킴의 그 절규 섞인 외침을 온몸으로, 뼈저리게 이해하게 되었다.
'시스템을 믿다가 모든 걸 잃게 될 거라고요!'
그 말은 감정적인 히스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먼저 겪어본 자의, 모든 것을 잃어본 자의 뼈아픈 진실이었다. 유진은 옳았다. 아키라는 텅 빈 눈으로 지휘소 반대편에 서 있는 유진을 바라보았다. 데이터 대신 직감을 믿고, 규율 대신 인간을 말하던, 그래서 그토록 증오스러웠던 남자가, 이제는 자신과 똑같은 고통을 겪은 유일한 이해자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