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조각의 무게
몇 번의 계절이 더 흐른, 눈부신 오후의 햇살이 깊게 스며드는 가을이었다. 혜진과 민우의 '책과 그림이 있는 집'은 이제 동네의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없어서는 안 될 쉼터가 되었다. 낡은 목조 건물을 개조한 공간의 커다란 창으로는,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황금빛 햇살이 길게 들어와 낡은 원목 바닥과 책장 사이를 따스하게 비추었다. 문에 달린 작은 종이 ‘딸랑’하고 울릴 때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들어와, 오래된 책들이 주는 위안과 그림이 주는 침묵의 대화 속으로 스며들었다.
혜진은 작업대 한편에서 다음 전시에 내놓을 화병의 표면을 부드러운 사포로 다듬고 있었다.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오롯이 그녀의 세계를 채웠다. 그때, 익숙한 커피 향과 함께 민우가 다가왔다. 그는 늘 소리 없이, 그림자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녀의 작업대 옆, 늘 비어있는 자리에 작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그녀의 첫 작품이었던 서툴고 비뚤어진 바로 그 찻잔이었다.
"손님 한 분이 당신 그림 앞에서 울고 있어요."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 혜진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흙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조용히 갤러리 공간으로 향했다.
구석진 벽,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던 시절 그녀의 절망과 분노를 토해냈던 첫 그림 앞에, 앳돼 보이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세상의 모든 무게를 짊어진 듯 위태롭게 축 처진 어깨, 어떻게든 울음을 참아보려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는 모습이, 마치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혜진은 조용히 발걸음을 돌려 작은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는 깨어진 영혼을 위한 작은 의식처럼, 마음을 진정시키는 캐모마일 잎을 꺼내 정성껏 차를 우렸다. 수많은 찻잔들 중에서 그녀는 일부러 가장 투박하고 못생긴, 가마에서 살짝 금이 간 찻잔을 골랐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무언의 위로였다.
놀라 돌아보는 여자의 붉어진 눈과 마주친 혜진은,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괜찮아요, 나도 그랬어요.' 어떤 말보다도 깊은 공감이 오가는 순간이었다.
혜진은 조용히 자신의 작업대로 돌아왔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가장 아팠던 생채기가 이제는 다른 이의 상처를 보듬는 따뜻한 빛이 되어주고 있음을 희미하게 느꼈다.
그날 오후 늦게, 잠시 가게 앞을 쓸던 혜진의 코끝으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이 스쳤다. 길을 지나가는 낯선 남자의 몸에서 풍기는, 전남편이 쓰던 짙은 스킨 향이었다. 순간 심장이 쿵, 하고 얼음덩이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눈앞의 평온했던 풍경 위로 차가운 나무 의자의 감촉, 서류가 스치는 소리, 그리고 ‘네가 뭘 안다고’라며 내뱉던 그의 경멸 어린 눈빛이 필름처럼 겹쳐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빗자루를 쥔 손끝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남자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찮아, 과거일 뿐이야. 하지만 몸이 기억하는 공포는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애써 쌓아 올린 평온의 성벽에, 보이지 않는 작은 균열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