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 사회 (확장판) - 에필로그

마지막 기록자

by sarihana

에필로그


기록을 마친 펜 끝에서, 혹은 마지막 문장을 타이핑한 키보드 위에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고요와 마주했다. 그것은 2050년의 인공적인 정적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쏟아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텅 비어버린 충만함이었다. 창밖은 여전히 잿빛이었고, 산성비를 머금은 구름은 금방이라도 도시를 삼킬 듯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어제와 같은 절망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조용히 열리고, 쉰을 앞둔 아들이 들어왔다. 어느새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과 현실의 무게에 깊게 파인 미간. 아들은 정부의 ‘안정 사회 기여’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제법 높은 직급의 공무원이 되어 있었다. 그는 내가 노트북 앞에 밤새 앉아 있는 것을 보고도 아무 말 없이, 그저 식어버린 영양 페이스트 옆에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려놓았다. 25년 전, 내게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라며 냉소하던 청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다 쓰셨어요?”


아들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의 시선이 노트북 화면의 마지막 문장에 잠시 머물렀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기록이었다.’


“이걸로… 뭘 하고 싶으신 거예요, 이제 와서.”


그것은 비난이 아니었다. 순수한 질문이었다. 한때 나의 글을 ‘상업적 가치’로 분석했던 아들은, 이제 이 글이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위험을 자초하는 일일 뿐이라는 것도.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더 이상 떨리지는 않았다.


“이건 세상을 바꾸기 위한 글이 아니다. 용서를 구하기 위한 글도 아니야. 그저… 기록일 뿐이다. 우리는 여기에 있었고, 이렇게 살았고, 이렇게 침묵했고, 그래서 이렇게 실패했다는 증거. 너에게 물려줄 것이 잿더미밖에 남지 않은 세상에서, 아비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우리가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정직한 해부도를 남기는 것뿐이었다.”


나는 먼지 쌓인 상자에서 낡은 외장 하드를 꺼내 아들 앞으로 내밀었다. 25년 전, 나의 모든 절망과 함께 봉인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네가 인턴 시절에 팔려고 했던 내 ‘절망’이 여기 전부 들어있다. 하지만 이건 이제 상품이 아니야. 너의 역사이고, 태어나지 않은 네 아이들의 과거이기도 하다.”


아들은 한참 동안 외장 하드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그의 눈에서 처음 보는 감정을 읽었다. 그것은 원망도, 동정도 아니었다. 길고 긴 터널을 지나 마침내 서로의 맨 얼굴을 마주한 자의 깊은 슬픔이었다.


아들은 외장 하드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골함을 다루는 듯한 손길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더는 외롭지 않았다. 나는 실패했다. 우리 세대는 명백히 실패했다. 그러나 나의 기록은, 나의 참회는, 이제 내 아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가 이 기록을 읽고 무엇을 느끼고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른다. 어쩌면 그는 이것을 영원히 봉인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으로 족했다.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나는 가장 작은 씨앗 하나를 심었다. 거대한 침묵의 시대에, 한 세대의 실패를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작은 목소리 하나를 남겼다.


창밖으로 새벽의 희미한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주 오랜만에, 나는 저 잿빛 도시 너머에서 해가 뜨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아주 작은 균열이라도 생긴다면, 모든 것이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기록이 바로 그 균열이 되기를.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쓸 이야기는 없었다. 이제부터는,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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