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 사회 (확장판) - Part26

마지막 기록자

by sarihana

4부: 참회록


나는 노트북을 덮었다. 전원이 꺼진 검은 화면 위로, 25년의 세월이 새겨진 낯선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독하게 지치고,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바로 나의 얼굴이었다. 25년 전, 나는 이미 이 모든 균열과 비명을 보고, 듣고, 기록했다.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을 때 누구보다 먼저 그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내 손으로 그 기록을 봉인하고 스스로 침묵의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


2026년 1월의 그 차가운 아침, 출판사의 계약서와 아들의 텅 빈 눈동자를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왔던 그날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때의 나는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세상은 어차피 바뀌지 않는다'고 속삭였다. 그것이 내가 나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건 비겁한 자기기만이요, 정교하게 포장된 변명에 불과했다. 나는 지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


나의 글이 더 이상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메스가 아니라, 사람들의 불안을 위로하며 소비되는 진통제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나의 절규가 시장의 소음 속에서 한낱 가십거리로 팔려나가는 것이 끔찍했다. 무엇보다, 사회의 거대한 외면과 가족의 싸늘한 무관심 속에서 나 혼자만 옳다고 외치다가 결국 닳아 없어질 내 영혼이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침묵을 택했다. 그것은 항복이었고, 투항이었다. 나는 침묵의 대가로 잠시의 평온을 얻었지만, 그 침묵은 보이지 않는 독처럼 서서히 스며들어 결국 나 자신을 영원히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이 비극의 시대에 살아가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진실을 외면하고 돌아선 공범이 되었다. 나는 24세 청년 이준우가 79세 노인 박영수를 향해 분노를 터뜨렸을 때, 그 방아쇠를 당긴 것은 그 청년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 총구는 수많은 나의 침묵과, 당신의 외면과, 우리의 무관심이 한데 모여 만들어낸 것이다. 친구 현규의 광기를 외면하고, 아내의 현실적인 절망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아들의 냉소에 침묵으로 동의했던 나의 모든 비겁한 순간들이 모여 그 총알을 장전했다. 우리는 서로의 고통에 눈감는 방식으로 각자의 안위를 지키려 했고, 그 결과 모두가 잠재적인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 시대를 만들었다.


이제 와 이 낡은 노트북을 다시 열고 펜 대신 키보드를 잡는 것은 영웅이 되기 위함이 아니다. 나의 기록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기 위함도 아니다. 나는 다만 증언하고 싶다. 우리가 과거에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 어떤 경고음을 듣지 못했는지, 사소한 균열이 어떻게 거대한 댐의 붕괴로 이어졌는지를 처절하게 복기하고 싶다. 이것은 죽어버린 시대를 향한 나의 부검 보고서이자, 나 자신을 향한 기소장이다.


우리가 그때 조금만 더 용기 냈더라면, 서로를 탓하는 대신 함께 목소리를 냈더라면, 눈앞의 이익과 안락함 대신 다음 세대의 눈물을 먼저 생각했더라면. 이 부질없는 가정은 이제 잿더미가 된 과거를 되돌릴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록해야만 한다. 이 실패의 기록이야말로, 내가 미래의 당신에게 남길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고통스러운 유산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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