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기록자
2026년 1월. (아버지의 기록)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계절이 한번 바뀌었다. 차가운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겨울이었다. 그동안 나의 기록은 계속되었지만, 그 성격은 완전히 변해버렸다. 이제 나의 기록은 부검의의 보고서처럼 차갑고 건조해졌다.
그해 겨울, 출판사에서 연락이 오기 며칠 전이었다. 대학 동기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한 사람의 소식을 전했다. 현규였다.
"너… 현규 소식 들었냐? 그 녀석, 몇 년 전에 자기가 활동하던 커뮤니티에서 모욕죄로 고소를 당했었대.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 겨우 합의했는데, 그 뒤로 사람들도 다 떠나고 완전히 폐인처럼 지냈다고 하더라. 얼마 전에… 자기 방에서 쓸쓸하게 죽은 채로 발견됐대. 고독사였지."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에도 한동안 손이 떨려왔다. "너도 곧 알게 될 거야."라던 현규의 싸늘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의 분노는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오히려 그 분노의 불길이 그 자신을 먼저 집어삼켰다. 나는 그가 광기의 늪에 빠져들고 있을 때, 논쟁하고 설득하는 대신 가장 쉬운 길, 외면하는 길을 택했다. 나는 그의 손을 놓아버렸다. 어쩌면 나 역시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친구 하나 구하지 못하면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나의 글은 얼마나 위선적인가. 깊은 죄책감이 나를 짓눌렀다.
그리고 며칠 뒤, 예상치 못한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국내 최대 출판사 중 한 곳의 편집자였다. 그동안 내가 인터넷에 익명으로 올렸던 기록들을 인상 깊게 보았다며, 정식 출판을 제안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심장이 희미하게 뛰었다. 어쩌면 나의 목소리가, 나의 절규가 완전히 공허한 메아리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이 아주 잠시, 고개를 들었다.
며칠 뒤, 나는 약속 장소인 출판사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젊은 편집자는 세련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시작했다. "작가님의 글, 정말 대단합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열광하는 '다크 리얼리즘'의 정수라고 할까요? 저희는 작가님을 '시대의 절망을 파는 작가'로 브랜딩 할 계획입니다."
'절망을 판다'는 말에 심장이 차갑게 식어 내리는 것을 느꼈다. 편집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사실 저희가 작가님을 찾게 된 건, 저희 인턴사원 중 한 명이 올린 보고서 덕분입니다. 작가님의 글이 가진 상업적 가치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분석해냈죠. 잠시 불러도 되겠습니까?"
회의실 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내 아들이었다. 아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편집자의 옆에 뻣뻣하게 굳어 섰다.
아들은 내 침묵을 독촉으로 느꼈는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아니, 작가님. 이건 좋은 기회예요. 요즘 사람들은 이런 어두운 이야기에 돈을 써요. 위로받고 싶어 하거든요.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하면서요. 이건 그냥… 콘텐츠예요. 소리쳐봐야 아무도 듣지 않는 세상에서, 이게 아버지가 살아남는 방식이라고요."
편집자가 두툼한 계약서를 내 앞으로 밀며 거들었다. "아드님 말씀이 맞습니다. 선인세도 업계 최고 수준으로 맞춰드리겠습니다. 이 책이 출간되면, 작가님은 더 이상 현실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들의 텅 빈 눈을 보았다. 내 아들은 나의 고통과 절망을 분석하여 상품 기획안을 만들었고, 그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인턴 자리를 얻은 것이다. 나의 저항, 나의 분노, 아버지의 죽음과 동생의 절망, 그리고 현규의 비참한 죽음까지. 내가 피를 토하며 써 내려간 모든 기록들이, 이제 누군가의 불안감을 달래주는 소비재가 되어 팔려나갈 운명이었다.
이것은 국가의 탄압보다 더 지독한 패배였다. 나의 절규는 그저 시장의 소음 중 하나가 되었고, 내 가장 큰 고통은 가장 높은 가격에 팔릴 상품이 되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왔다.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노트북을 열었다. 모든 기록 파일을 '과거의 기록'이라는 폴더 하나에 담았다. 그리고 창고 깊숙한 곳에서 먼지 쌓인 구형 외장 하드를 꺼내 그 폴더를 옮겨 담았다. 노트북에서는 파일의 모든 흔적을 지웠다.
나는 그 외장 하드를 들고 아버지의 유품이 담긴 낡은 상자 밑바닥에 숨겼다. 다시는 꺼내 보지 않으리라, 이 절망의 기록과 함께 나 자신을 봉인하리라 다짐하며.
펜은 더 이상 세상을 향한 무기가 아니었다. 그저 내 자신을 팔아넘기는 도구가 될 뿐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기록이었다. 침묵의 세계를 유지하는 유령 같은 부품이 되기로 선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