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3장 감정은 나의 기계다

by 이선율


한때 나는 감정이란 걸 '견뎌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분이 나빠도 참고, 상처를 받아도 애써 무시하고,
화를 느껴도 억누르는 것이 ‘성숙함’이라 배웠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자주 부서졌다.

감정을 억누르려는 모든 시도는
마치 폭주하는 엔진에 브레이크만 계속 밟는 것과 같았다.
무너짐은 예고 없이 반복됐고, 나는 자책하고 회피하며 내 감정을 부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다른 방식으로 감정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감정은 ‘멈춰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해석되어야 할 신호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은 정지 신호,
불안은 방향 오류,
분노는 경계 침범,
무기력은 회로 단절.

감정은 나의 정신 시스템에서
외부 세계와 내면 사이의 ‘미세한 진동’을 감지하고 반응하는
정밀한 경보 장치였던 것이다.

나는 슬플 때 슬퍼하는 게 아니라,
‘왜 지금 슬픔이라는 신호가 작동했는가’를 보기 시작했다.
불안할 때 그것을 억누르기보다,
“지금 나의 시스템은 어디에서 균형을 잃었는가”를 감지했다.

그 순간부터 감정은 내 적이 아니라,
내 안에 내장된 정밀한 센서 시스템으로 느껴졌다.

감응자에게 있어 감정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언어 이전의 메시지이고,
사유 이전의 패턴이다.

그 감정을 억누르거나 피하지 않고,
하나하나 기록하고, 해석하고, 구조화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나는 내 감정의 ‘기계적 작동 원리’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장은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에서
감정을 운용하는 존재로 넘어가는 전환점이다.
감정은 내 약점이 아니라,
나라는 시스템이 세계와 소통하는 가장 정직한 인터페이스였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이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2화2장 나는 왜 쉽게 무너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