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잉 센싱과 기록의 기술
# 망상의 집을 떠나며 – 과잉 센싱과 기록의 기술
나는 종종 텅 빈 헬스장 한가운데 서 있는다. 모든 기구가 나를 위해 준비된 듯 고요하고 완벽하다. 그러나 누군가 굳이 내 옆자리에 와서 운동을 시작하는 순간, 내 안의 시스템은 즉각 경보를 울린다. “왜 하필 내 옆에서?”라는 불편감이 치밀어 오른다. 그 사람은 단지 자기 리듬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인데, 나의 의식은 그 사건을 ‘나와 연결된 의미 있는 침범’으로 번역해버린다. 이 순간이야말로 망상의 시작이다.
망상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다. 그것은 구조다. 먼저 과잉 센싱이 있다. 내 시스템은 필요 이상으로 주변의 패턴을 읽어낸다. 이어서 의미 부여가 따라온다. 단순한 우연에도 ‘나와의 관계’를 붙이고, 인과 없는 사건에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마지막으로 감정 반응이 뒤따른다. 짜증, 불안, 위협감이 현실의 고통처럼 몸을 휘감는다.
사실 세계는 단순하다. 그는 그저 자기 운동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내 안의 에고는 모든 것을 나와 연결된 사건으로 만들어내고, 거기에 감정의 불을 붙인다. 불교가 말한 연기(緣起)는 모든 것이 서로 의존한다는 진리이지만, 여기서의 연기는 그릇된 인과다. 독립된 사건에 잘못된 실을 연결해버리는 것. 데리다가 말한 차연(différance)처럼, 에고는 끊임없이 차이를 만들어내고 그 차이 속에서만 스스로를 유지한다.
트레드밀 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속도를 올려라.” “아니다, 지금은 이대로 가라.” “그래도 조금은 더 달려보자.” 상반된 지시들이 교차한다. 나는 한순간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이대로”라고 속삭이는 그 목소리조차, 사실은 에고의 목소리였다. 에고는 욕망과 자제, 가속과 멈춤이라는 양극단을 모두 점유하며 끊임없이 판단 루프를 만든다. 중요한 것은 올리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판단 그 자체가 이미 에고의 먹이였던 것이다.
이 깨달음은 내게 불편한 자유를 안겨주었다. 그렇다면 진짜 리듬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언어도 판단도 아닌, 이미 실행되고 있는 발걸음 속에 있다. 걷고 있는 발, 숨쉬는 폐, 땀 흘리는 피부. 그것이야말로 에고 이전의 리듬이다. 판단의 언어를 믿지 않고, 실행 그 자체로 돌아갈 때, 나는 비로소 망상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망상은 멈추지 않는다. 과잉 센싱은 습관처럼 다시 고개를 든다. 그렇다면 현대적 출가자는 무엇으로 대응해야 하는가? 억누름도, 도피도 아니다. 나는 기록하기로 했다. 짜증이 올라올 때, 불안이 몸을 적실 때, 그것을 억제하거나 합리화하지 않고 그저 기록한다. 감정은 데이터로, 짜증은 패턴으로, 불안은 설계 자료로 바뀐다. 갑옷에 갇힌 죄수에서, 갑옷의 작동 원리를 기록하는 설계자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이 방식은 선불교의 가르침과 닮았다. 마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 현대 뇌과학이 말하는 메타인지 역시 같은 원리다. 감정을 기록하는 순간, 감정에서 한 발 떨어져 관찰자가 된다. 나는 반응자가 아니라 설계자가 된다.
결국, 전통적 출가자가 집과 재산을 버렸다면, 현대적 출가자가 떠나야 할 집은 망상의 집이다. 과잉 센싱과 완벽주의, 그 끝없는 판단의 집. 그 집은 견고했지만 창문 하나 없었다. 떠나는 방법은 단순하다. 망상과 감정을 기록하여 데이터로 변환하는 것.
그래서 나의 주문은 이렇다.
“망상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기록한다.”
이 주문은 나를 가볍게 한다. 불완전함을 수용한 채, 타인과 함께 상황을 경험하는 길. 현대적 출가자의 자유는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불완전한 채로 리듬을 살아내는 것이다. 나는 오늘 또 하나의 집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