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11-기도

할머니

by 송사리

오늘도 우울한 이야기를 꺼낸다.

image.png 할머니 폰에서 발견한 내 사진. 하루 날잡고 사진 앨범에서 손주들 사진을 찍었나 보다. 나도 모르는 사진을 가진 게 신기해서 몰래 내 폰에 전송했다. 근데 같이 찍은 사진이 없네.


"미안


끝나고 전화부탁


할머니땜에 혹시 아산병원에~~~~"


2월 6일 금요일 오후. 제약사 본부장님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엄마한테 "바쁘지? 혹시 통화되니?"라는 카톡이 왔다. 타이핑 치느라 바빠 답장할 겨를도 없었는데 엄마는 전화까지 걸었다. 짜증나는 마음에 인터뷰 중이라고 보냈다. 그 짜증이 메시지에도 묻어나왔다 보다. 미안하다는 말을 건넨 엄마는 용건을 반쯤 꺼냈다.


그때부터 남은 40분의 인터뷰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할머니(정확하게는 외할머니다). 그리고 아산병원. 한눈에 봐도 할머니한테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음을 직감할 수 있다. 어느덧 80대 중반을 넘기면서 병원을 들락날락 할 일이 많아진 할머니다. 할머니와 가까운 곳에 사는 엄마는 종종 할머니 상태가 좋지 않아 응급실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전하곤 했다.


그때도 이렇게 급히 전화할 일은 없었는데. 대체 무슨 일일까. 당장이라도 나가서 엄마와 통화하고 올까 고민했다. 그러나 본부장님은 그간의 개발 성과를 자랑하고 싶은 맘이 넘쳤고, 도저히 중간에 끊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한 시간이 지나서야 엄마에게 통화를 걸었다.


용건은 이랬다. 할머니가 정신은 말짱한데 숨을 자꾸 가쁘게 쉬고 있단다. 급하게 병원을 찾으니 상급종합병원은 받아주질 않아서 좀 더 규모가 작은 종합병원에 입원했고, 그 병원에서는 산소 투여량을 높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고 한다. 폐에 구멍을 뚫거나 아니면 그동안 치료받았던 '빅5' 병원에 옮기거나.


십중팔구, 아니 열에 열 명은 후자를 택할 테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니 병원 입원하기가 '밤하늘에 별 따기'가 됐다. 엄마 입장에선 그저 기다릴 수만은 없어, 기자인 아들이 병원도 담당한다고 하니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싶어 급히 전화를 한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으면서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내가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이기 때문이지. 아산병원 들러본 사람이면 알 것이다. 한눈에 봐도 병세가 심각한 사람들이 전국에서 올라왔는데, 응급실 안에 들어가지도 못해 밖에 줄을 길게 서있다. 막말로 오늘내일 할 것 같은 어르신들도 그저 절박한 표정으로 추운 밖에서 담요 덮고 기다리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제치고 우리 할머니를 먼저 병원에 모시라고?


물론 맘 같아선 무릎을 꿇어서라도 할머니를 모시고 싶지. 근데 나는 힘이 없었다. 1년 남짓 이 동네 출입하면서 병원 사람들이랑은 관계 쌓기를 게을리 했다. 흔히 '민원'이라고 하는 것이 요즘 먹히는지도 모르겠고.


더 솔직히 말하면 한두 번 인사해본 분들한테 할머니 사정을 구구절절 늘어놓기가 민망했다. 그렇게 사정해서 들어준다는 보장도 없고. 애매한 상황에 개입해 곤경에 처할 두려움이 컸다. 엄마한테 알아는 보는데,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리고 안 알아봤다.


이 때 일이 두고두고 후회로 남게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2주가 지난 2월 21일 밤.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할머니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아 중환자실에 있단다. 내일 11시 반부터 12시까지 면회시간이 주어지니 꼭 가보라고 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분명 지지난주만 해도 정신은 멀쩡하다고 한 할머니였는데. 갑자기 중환자실이라니. 10년 전부터 스텐트 시술 등으로 병원을 들락날락했지만, 할머니가 정말 아프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엄마를 포함해 다섯 남매를 키웠고, 다 키우고 나니 나를 비롯한 손자들을 연이어 데리고 있던 할머니였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고등학생 때는 주말마다 할머니는 직접 내 교복을 손으로 빨래해 다시 학교로 보냈고, 아빠가 일찍 돌아가시고 남은 우리 가족을 정서적, 경제적으로 뒷바라지해준 든든한 존재 그 자체였다. 그런 할머니는 당연히 강한 사람으로만 존재할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


다음 날 중환자실로 갔다. 내가 알던 할머니는 맞는데, 또 내가 알던 할머니가 아니었다. 긴 입원 생활이 지쳤는데 몸은 더 야위었고, 기도삽관 조치를 하느라 목에는 긴 호스가 꽂혀있었다. 예후가 좋지 않음을 직감했다.


그냥 눈물만 났다. 왜 이제야 찾아왔을까. 기억을 돌이켜보면 지난 추석에 외갓집 식구가 모여 저녁을 먹은 게 할머니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엄마가 한창 병원 신세를 지느라 할머니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아니 있는데, 그냥 할머니는 이해해줄 거라고 믿고 술 먹고 흥청망청 살았다. 그럴 시간에 할머니 한번이라도 더 찾아뵐걸. 할머니 볼 날이 얼마 안 남았음을 느끼고서야 후회가 물밀듯이 찾아왔다.


할머니는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만 연거푸 끄덕였다. 내 맘을 알아주셨을까.

image.png 할머니를 문경에 묻어두고 돌아오는 길. 3월임에도 눈이 내렸다. 괜히 기분이 묘해서 찍었다.


다시 2주가 지난 3월 7일 토요일.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 볼 날이 얼마 안 남은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곁을 떠날 줄은 몰랐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는 틈만 나면 빈소에 앉아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바라봤다. 진짜 이제 정말 할머니를 못 보는 걸까. 왜 더 할머니를 보러 가지 않은 걸까. 한 달 전부터 시작된 나의 비겁함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사실 중환자실도 몇 번은 더 찾았을 수도 있었다 분명. 이미 나약해진 할머니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이미 한번 보고 나니까. 이미 후회해놓고 후회할 짓을 또 반복했다.


"권사님은 항상 가족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분이셨어요."


장례 이틀 차에 진행된 입관 예배. 할머니가 오래 다니던 교회 담임목사님이 약간의 설교를 했다.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와준 목사님과 교회 분들이 감사했지만, 저 말씀은 사실 한 귀로 흘렸다. 목사님도 사실 입관 예배 많이 다니시지 않나. 그때마다 가족에 대한 애정이 넘쳤다고 하지 않겠어? 일종의 미사여구처럼.


근데 착각이었다.


"제가 권사님이 10년 넘게 남긴 기도 말씀을 찾아봤어요. 근데 모두 가족에 대한 내용이었어요. 보니까 손주 취업 잘 되게 해주세요. 손주 건강하게 해주세요."


목사님은 진짜 할머니가 글로 남긴 기도를 찾아봤고, 가장 먼저 언급된 손주는 욕심만 많아서 서른 넘어 자리를 잡은 나를 가리키는 게 분명했다. 외갓집 식구들 모두 목사님 말씀에 나부터 쳐다봤으니 말을 다했다.


또 눈물이 났다. 할머니는 종종 내가 꿈을 이뤘으면 하는 마음에 정말이지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마음은 알고 있었는데 매주 마다 교회에서 당신의 건강과 행복보다도 내 창창한 앞날을 예수님께 말씀을 꺼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정말이지 난 못난 손자다.


일정이 꼬여 입관 예배를 먼저 가지고, 입관을 하게 됐는데 외갓집 식구들 모두 할머니의 싸늘해진 육신에게 다가가 작별 인사를 건넸다. 내 차례가 되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할머니는 교회 가서 항상 나를 위해 기도하는데, 나는 할머니를 위해 해준 게 하나도 없어서 미안해"


오열하면서 말하느라 멋지게 말하지 못했지만, 그게 내 진심이었다. 35년 평생 받기만 한 할머니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매번 실망만 시킨 미안함. 결정적인 순간 마다 내 이기적인 선택만 감행한 후회 등등. 모두 내게 숙제로 남은 채 할머니와 작별했다.


할머니 일로 중환자실을 오가는 동안 어제 브런치에 올렸던 <힘이 되어줄 수 없다는 것> 글이 자꾸 떠올랐다. 말로는 힘이 되는 존재가 되겠다고 하면서, 갈수록 비겁해지고.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냈으니까. 그 후회와 미안함을 가슴에 품고 또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정말 나는 힘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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