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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로디 옹그 Dec 16. 2024

강수지 개인전 <<이름 없는 장소>> 서문

"해양의 메타포, 휘감고 풀리는 들이쉬고 내쉬기"

강수지, <요동치는_4>, oil, acrylic, white clay on panel, ( 판넬에 백토, 아크릴, 유화,색연필 ), 112.1 × 145.5 cm 2021


  한 2년 전이었을까. 대학원실 스튜디오에서 내 발걸음을 잡은 작품은 <요동치는> (위 이미지) 였다. 그 인연이 번져 첫 개인전 서문을 쓰게 됐다. 전시로 안 보일 수 있는 부분을 드러내주려고 노력했다. 글은 늘 조심스럽다.
!!!
  이번주 수요일(2024.12.18) 청년베프에서 강수지 화가의 첫 개인전 <<이름 없는 장소>> 가 열립니다. 많이 오셔서 응원과 피드백의 말씀 전해주세요. 내년 1월 6일까지 하네요. 전 첫 날 가보려고 합니다.  


#강수지작가 #청년베프 #전시

전시 서문 <해양의 메타포, 휘감고 풀리는 들이쉬고 내쉬기>
- 글. 홍희진(독립큐레이터)

  경관의 인상적인 안녕(安寧)은 시선을 묶는다. 장소의 강렬함은 내가 느끼는 낯설음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풍경의 생경한 배치로 자아내는 것인지, 혹은 새로움에서 주는 전환의 분위기인지 알 수 없이 그러저러하다. 여기서 ‘알 수 없음’이 주는 의문이 중요한데, 이것을 향해 우리는 사유 그 이상의 중간지대로 이동할 수 있다. 메를로 퐁티는 ‘본다는 것, 곧 시지각은 사유의 양태 내지 자기에게 현존하는 양태가 아니다. 오히려 시지각은 내가 나로부터 부재하는 방법’ [1]이라고 말하는데, 그 순간은 바로 나로부터 빠져나와 외부를 목격하는 시간이자 나로 가득한 나를 비워 우주에게 관통당하는 시간인 것이다. 개인 경험과 무색하게 어떤 곳에 처음 가보지만 익숙할 때가 있고, 여러 번 가본 곳이지만 낯설 때가 있다. 우리의 시지각은 무엇을 목격하고 수련하는가. 본다는 것은 어떤 시간인가. 이 글은 이러한 시공간에 들어선 화가 강수지가 최근 4년간 그려낸 작품들로 구성한 첫 개인전 《이름 없는 장소》의 서문이다. 작가는 여러 번 거주지를 반복적으로 이동하며 낯설고도 편안한 느낌을 얻었는데 이러한 긴 호흡을 통한 삶의 체득과 눈을 감으면 반복적으로 상영되는 이미지 세계를 시작으로 작품들을 펼치고 있다.

  "눈을 감으면 펼쳐지는 세계가 있다. 검은 배경 위로 형광 빛들이 춤을 춘다. 그 빛들은 모였다 흩어지며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그렇게 잔상들은 하나의 세계를 완성한다. 이건 상상이 아니다. 꿈도 아니다. 단지 눈을 감으며 매번 펼쳐지는 환영이다. 환영의 시작은 언제나 어둡다. 깊은 그림자 속에서 작은 빛들이 피어오른다. 그러나 어느 순간, 형상들이 선명해지고 색이 밝아지면서 새로운 세계가 드러난다.”
   위의 인용은 작가 노트 속에서 발췌한 문구이다. 작가가 매번 만나는 환영은 구조화되어 있지 않은 영상이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게 선후가 엉켜진 채 잔상들로 만들어져 나타난다. 어디라고 말할 수 없는 이름 없는 부재의 공간이지만 실재한다. 안(目)내 어두운 우주 섬광 알갱이들과 같이 피어오른 작은 빛들이 춤추고 있는 세계를 듣는다. 감은 눈 속에서 눈을 뜬다. 그 세계는 설명하기 어려운 구조와 움직임을 지니고 있지만 작가는 세계의 메타포를 듣는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존재들과 정동의 대화를 한다.
   이번 전시는 <설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리고 <요동치는> 시리즈 작품들로 구성되는데, 작가가 유년 시절을 보낸 제주도 날씨를 기본 소재로 삼는다. <설원> 작품은 2024년에 제작한 가장 최근의 작품으로 폭설에 뒤덮여 고립된 풍경에서 화폭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나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설경의 아름다움을 뒷전으로 가야 할 길을 막고 길을 감춘 채, 자신도 반쯤 감춰진 채 서 있게 된 나무는 나를 멈춰 세우고 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작품은 꿈에서 시공간의 구조가 해체되어 신체와 사물들, 분위기들이 온통 뒤엉킨 가상이미지를 나타낸다.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혼란을 해결할 의지나 필요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저러한 상태 그 자체를 그려내고 있고 여기서 우리는 작가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림 속 주체로 보이는 자의 머리들은 분리되어 떠다니지만 신체와 기관을 이루지 않은 채, 곁의 동물처럼 동행하듯 서로를 염두하며 천천히 어디론가 이동 중인 눈치이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_낙하산 표류기> 작품 시리즈는 두 점인데, 하나는 차가 몇 대 주차되어 있는 인공물 위로 내린 폭설 사태에 하나의 거대 낙하산이 갓 떨어졌고, 다른 것은 동물 무리를 덮치듯 불시착하는 낙하산의 급박함을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다. 작가는 그림으로 징후를 나타내듯 자연과 인공물에 각각 낙하산을 투하시켜 보고 폭설 경관에 나타난 사건을 드러낸다. 정지화면 같은 주차장 설경과 달리 산 중턱으로 보이는 곳에 낙하산이 떨어진 상황은 동물들의 달아나는 장면들로 상당히 요동친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작품 시리즈는 이렇듯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담지자와 어딘지 모를 곳의 낙하산 표류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제주 바다를 보고 자란 작가는 어려서부터 이사를 자주 다니며 화산이 폭발하는 꿈, 귀신이 나오는 꿈을 자주 꾸었다고 한다. 어른이 돼서도 섬 밖의 세상을 동경하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할 것 같은 이질감과 불안감을 지니고 있어 스스로 표류와 고립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화폭 위 표류한 낙하산은 이러한 작가의 심리상태를 표상하고 있지만, 폭설로 고립된 장소가 된 이 장소의 이름을 없애고 위칫값을 잃게 한 것은 형광물질, 바로 색이다. 현실에 드리운 형광물질은 감은 눈의 세계에서 자주 등장하는 춤추는 형광 빛 무리이다. 이 미학적 장치로 장소는 현실도 환영도 아닌 공간으로 생성된다. 작가는 고립감을 현실에서 미끄러진 장소로 포착한다.
   폭설이 고립으로 이어져 삶의 흐름을 멈추게 하는 시간과 그 멈춘 시간 사이에서 다양한 사건들이 펼쳐지는 장소들로 이어지게 했다면, <요동치는> 작품은 파도치는 바다에서 살아가는 선인장의 이야기 즉, 해양의 메타포로 이어진다. 이 선인장은 제주도의 쿠로시오 해류를 통해 지구 반대편 멀리 멕시코로부터 건너온 생명의 씨앗으로부터 자라났다. 제주도 월령리 해안가에 가면 선인장 군락지를 만날 수 있는데 그 장소에서 작가는 영감을 받는다. 제주도 해안에 자란 선인장의 유목형 자아 확장은 작가의 화폭에서 바닷속으로 뿌리내린 선인장으로 극대화되어 드러난다. 우리는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파도 아래 바닷속 선인장이 어떻게 뿌리 내리고 있는지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여기에 해양의 메타포가 담겨있다.
   “이 해양 세계에서 모든 존재는 타자에게 휘감기도록 휘감을 수 있는 덩굴손을 뻗어 자기 자리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 이렇듯 존재들은 서로를 붙잡아, 그러지 않으면 자신들을 산산이 쓸어버릴 물살에 필사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바닷속 문어와 말미잘을 관찰해 보라. 그것들은 집합도 융합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상호 침투한다.” [2]
   날씨-세계를 철학하는 사회 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마르셀 모스 『증여론』을 참고로  사람과 집단을 움직임 속에서 연구하며 해양의 메타포를 발견하는데 모든 존재의 촉수는 선 다발을 만들어 ‘서로를 휘감아 무한히 확장하는 그물망’을 이룬다고 말한다. <요동치는> 작품에서 우리는 작가가 그리지 않은, 그림 밖이자 그림 안인 해저에서 바로 이러한 것들을 작가가 성찰한 것과 같이 상상할 수 있다. 바닷속 선인장은 매일 다르게 다가오는 파도치는 환경 속에서 선 다발을 통해 감고 풀면서 그러한 힘으로 생동하는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다. 생(生)의 경이로움이다. 요동치며 흔들리는 선인장은 바다 아래 주변의 것들과 서로를 휘감는다. 강수지 작가 작품이 우리를 휘감는 매혹은 여기에 있다. 마치 어두움 속 별 무리가 소용돌이쳐서 빛의 회전축으로 잔상의 강렬함을 빛의 선과 같이 우리 눈에 명징하게 들어올 때, 그 요동치는 생기로 순간 나 자신이 자신으로부터 부재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늘 그랬듯 요동치는 가운데 나를 비로소 자신에게 복귀할 줄 아는 자로서 돌아오듯 말이다.


[1]

 메를로퐁티, 『눈과 마음: 메를로퐁티의 회화론』, 김정아 옮김, 마음산책, 2008, 136쪽. 퐁티는 시지각이라는 나로부터 부재하는 방법을 거친 후에 ‘비로소 나는 나 자신으로 복귀한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시지각은 나로 복귀하는 방법이다.

[2]

팀 잉골드,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 차은정 권혜윤 김성인 옮김, 이비, 2024,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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