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힘과 언어유희의 즐거움

나는 이런 것을 배워 왔다 - 1: 권위와 남아선호사상

by 사색림
태어나보니 언니라는 존재가 있었다.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나는 언니를 졸졸 따라다녔고, 언니가 하는 것은 무조건 따라 하고, 언니가 학교에 가버리면 울었고, 언니가 가진 물건이라면 무조건 가져야 한다고 떼를 썼다고 한다.


겁 없고 호방한 성격을 타고난 나와 달리 언니는 온순하고 겁이 많았다.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언니는 전화기 울리는 소리에도 울음을 터뜨렸고 오랜 출장을 다녀온 아빠의 낯선 모습에도 울었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도 어렸던 젊은 엄마는 나와 언니를 북한산에 데리고 올라가며 애를 먹었다고 한다. 엄마 손을 뿌리치고 앞서 나가는 나를 잡기 위해 쫓아가면서, 뒤로 엄마 손을 잡아당기는 언니를 챙겨야 해서.


겁이 많고 착한 언니는 여느 K-장녀와 다름없이 나를 잘 챙겼다. 내가 온갖 고집을 부리고 언니 물건을 빼앗는 패악질(?)을 부려도 언니는 꾹 참았다. 그러나 부처님도 아닌 어린아이였던 언니의 인내심에도 한계는 있었을 것이다. 인내심이 바닥나면 언니는 폭발했다. 어느 날, 기억나지 않는 어떤 도발로 언니의 인내심을 바닥낸 나는 초록색 양장 위인전 책 모서리로 머리를 찍혔다. 폭발한 언니는 마치 미쳐 날뛰는 초식동물의 우악스러운 면을 지니고 있었다. 평소엔 지킬 박사처럼 부모님 말 잘 듣고 공부 잘하고 동생 잘 챙기다가, 분노로 눈이 뒤집히면 잔인한 하이드로 변신했다.


그런 언니를 한국에서는 무조건 언니라고 불렀다. 부모님의 이름을 알지만 함부로 이름으로 부르면 안 된다고 배우는 것처럼, 나는 어릴 때부터 언니의 이름을 알았지만 그건 다른 이에게 3인칭으로 언니를 호칭할 때나 쓸 수 있는 이름이라고 배웠다.


호칭에 변화가 생긴 건 1994년 어느 날이었다. 아빠의 회사 발령 때문에 온 가족이 호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한글을 늦게 깨친 건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영재 소리를 듣던 언니와 비교하면 거의 지진아였던 나를 엄마는 조금 걱정했던 것 같다. 그날부터 거실 벽에는 Squirrel, Giraffe 같은 친근한 얼굴에 어려운 스펠링을 가진 영어단어 카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내 의식 속에 조각조각 남아 있는 장면들이 있다. 쌍문동의 그 작은 아파트에서 엄마는 나에게 영어 벼락치기를 시키려고 했고, 나는 엄마의 조바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기린이 '쥐라프'가 되고, 다람쥐를 '스쿼럴'이라고 부르며, 피읖과 에프(F) 발음은 비슷하면서 다르다는 것을 배우며 즐거워했다. 다르게 들리는 소리가 같은 대상을 지칭한다니. 언어란 참 재미있는 것이구나.


그중에서도 가장 즐거웠던 장면. 엄마는 나에게 호주에 가면 더 이상 언니를 언니라고 부를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럼 뭐라고 부르는데? 이름으로 불러야지. '아무개야~' 하고. 마치 친구를 부르듯이. 겨우 네 살이었던 나는 연년생인 언니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는 말에 희희낙락했다. 빠른 출생으로 다섯 살보다는 여섯 살에 가까웠던 언니는 입술을 쭉 내밀었던 기억이, 그 순간의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건 마치 '언니'라는 말에 담긴 권위를 무너뜨리는 쾌감 같은 것이었다. 나보다 높은 계단 위에 서 있던 언니라는 존재가 강제로 끌려내려 와 나와 같은 눈높이에 서야 한다는 느낌, 그게 어린 마음에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언니가 입술을 쭉 내밀었다는 건 내가 얻는 만큼 언니가 무언가를 잃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언니'라는 호칭에 담긴 권위를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


서로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권력이라는 것과, 언어의 관행이 그 권력관계를 규정한다는 것을 그때 나는 배웠다.


한국의 존댓말과 반말 체계에 완전히 익숙해지기 전일 때 다른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언어에서는 관계가 다른 방식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배운 건 실로 큰 행운이자 축복이었다. 언어가 달라지면 같은 사람도 다른 방식으로 대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었다는 것이니까. 언어가 권위를 부여하기도 하고 빼앗아가기도 한다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 깨달은 덕에 사회가 부여한 권위로부터 남들보다 조금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내가 남들보다 권위로부터 자유로웠던 첫 사례는 여섯 살 무렵의 기억에서 찾을 수 있다.


호주에 산 지 2년이 되던 해에, 그러니까 내가 여섯 살이었을 때 동생이 태어났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 호주 집 안방에서 놀 때였다. 부모님이 언니와 나에게 물었다. 아들일 것 같아, 딸일 것 같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언니와 나는 약속이나 한 듯 외쳤다. 딸! 딸! 딸!


그때 부모님 얼굴의 복잡 미묘한 표정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둘째인 내가 아들이 아닌 딸로 태어난 탓에, 아빠가 장남이고 장남은 대를 이을 남자 후손을 생산해야 한다는 이상한 전통적 강박 때문에 엄마와 아빠는 한 번 더 아들을 낳아보려고 시도한 것이었는데, 딸들이 딸만 외치다니.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아니야! 아들이어야 해!라고 윽박지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착잡했을 것이다, 나의 부모님은.


누군가 그랬다. 임신해서 아직 성별을 모를 때 어린아이들에게 물어봤을 때 아이들이 한 대답이 현실이 된다고.


언니와 나의 예언대로 동생은 딸이었다. 그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호주에 와 계셨다. 아마 아들일 거라는 희망을 갖고 그 먼 걸음을 하셨으려나. 향교에 다니던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우리 할아버지의 해외여행은 아마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동생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층 집이던 당시 호주 집에서 층계 맞은편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현관문을 할아버지와 같이 걸어 나가던 장면이 마음속에 오래된 사진처럼 남아 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침대에 누워 있는 엄마는 부어 있었다. 동생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만년 막내였던 나는 막연히 그림에 나오는 예쁘고 하얀 살결의 오동통한 아기를 상상했는데. 동생과의 첫 만남은 충격적이었다. 조그마한 얼굴은 금방 터질 것 같은 빨간색에, 그 빨간 얼굴 한가운데에 있는 콩알만 한 코는 마치 딸기 씨앗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박힌 것처럼 오돌토돌했다. 커다란 검은 눈동자를 활짝 뜬 아기의 얼굴을 상상했었는데, 눈도 겨우 실눈처럼 뜬, 전체적으로 상한 딸기같이 생긴 신생아 동생이 나는 웃기기만 했다.


초면부터 동생을 우스워하던 그때, 할아버지가 중대 발표를 했다. 아이 이름은 소영이라고 짓는다고. '영'자 돌림이었으니 크게 놀라운 작명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 어린 나는 그 모든 상황을 비웃고 싶어졌다.


"할아버지, 소용없어서 소영이라고 지으신 거죠?!"


어린아이들은 다 안다. 부모가 내색을 안 하려고 해도, 아들을 원하는데 딸이 태어나서 실망했다는 걸. 할아버지가 내색을 안 하려 해도, 손자를 보고 싶어 했는데 손녀가 태어나 실망했다는 걸. 남아선호사상이라는 개념은 이해하지 못해도, 다들 아들을 원했는데 딸이 태어나 기대한 것만큼 기쁘지 않다는 걸, 아이들은 다 안다. 아이들만큼 어른들의 표정과 말과 행동과 몸짓을 예리하게 관찰하는 사람은 없다. 아이들은 기억력이 좋다. 내 이름은 누가 지었냐고 했을 때, 부모님은 언니와 내 이름은 자기들이 지었다고 했었다. 작은아버지네 아들들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었다. 자연스레 어린 내 머릿속에는 '아들 이름은 할아버지가 짓고, 딸 이름은 부모가 짓는다'는 도식이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동생은 딸인데도 이름을 할아버지가 지었다. 그것도 '소용없다' 할 때의 '소용'이라는 단어와 발음이 유사한 '소영이'로. 나는 그게 우스웠고, 그 우스운 상황을 모두와 공유하고 싶었을 뿐인데.


당황한 아빠가 할아버지를 등지고 서서 나에게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농담도 못하나. '소용'과 '소영'의 비슷한 발음에 착안한 언어유희를 왜 다들 이해를 못 하는 거야. 이게 안 웃겨?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빠의 험악한 표정은 아마도 내가 겪은 최초의 검열이었다. 비록 내가 불쑥 말하는 바람에 사후적 검열이 돼버리긴 했지만. 어린 딸의 농담에 그토록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는 건, 나의 언어유희가 어딘가 아픈 곳, 숨기고 싶은 것을 벌건 대낮에 홀라당 벌거벗겼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빠와 엄마와 할아버지는 아마도 아들을 원했을 것이다. 그걸 어린 딸인 내가 간파해 조롱했으니. 남아를 선호하는 유교 전통이 강한 가부장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겠지.


동생의 이름은 물론 그 후에도 다른 언어유희의 제물이 됐다. 호주 병원에서 퇴원하기 전까지 간호사들은 동생의 이름표를 보고 웃었다. 'SO YOUNG'. 너무 어린 신생아의 이름이 '너무 어리다'라니. 할아버지가 이름 하나는 참 잘 지으셨다.


나는 내 동생이 여동생이라 참 좋다. 그리고 비록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곳에서 태어났지만, 그곳 외에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산 덕분에 언어가 규정짓는 관게의 의미와 내가 존중할 수 없는 귄위를 비웃을 도구로 언어를 사용하는 법을 배운 것이 참 감사하다. 그것이 이후 내 밥벌이 수단 중 하나가 되었으니..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