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런 것을 배워 왔다 - 0

서른여섯 해 동안 내가 배운 것들을 기록하기에 앞서

by 사색림

사는 게 고달파서였을까. 스물셋 무렵 그런 생각을 했다. 얼른 나이를 먹어 삼십 대 중반이 됐으면 좋겠다고.


서른 중반이 되면 세상을 살아가는 게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나이 어린 여자라고 무시하기엔 청춘보다 중년에 가까운 그런 나이가 서른 중반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풍파를 어느 정도 겪었고, 사회생활과 처세도 매끄럽고 원활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관록이 생겼을 서른 중반의 내가 그때는 참으로 부럽게 느껴졌다. 매일 흔들리고 조금씩 부서지는 그런 느낌 없이, 넘실대는 파도 같은 세상사를 안정적으로 넘나드는 굳세고 균형 잡힌 어른인 사람. 주변으로부터 업무능력을 인정받고 착실히 직장생활을 하는 모습을 막연히 기대했다.


그때는 몰랐다. 기대는 이루어지는 경우보다 깨지는 경우가 더 많다는 걸.


그토록 고대하던 서른여섯이 됐건만, 나의 기대 중 현실이 된 건 손에 꼽는다. 세월이 얼굴에서 앳됨을 지워준 덕에, 아니면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산 덕에, 한국에서 살던 이십 대 초반의 내가 겪었던 수모 -- 한국에서 남자로 태어났다면 겪지 않아도 됐을 일들 -- 는 거의 겪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내가 중년이 더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인지, 아니면 생활의 터전이 바뀌어서인지도 확실치 않다.


세상 풍파를 어느 정도 겪었지만, 그렇다고 사회생활과 처세가 매끄러워지지는 않았다. 넘실대는 파도 같은 세상사에 하염없이 흔들리고 조금씩, 어떤 날엔 많이, 부서지는 그런 느낌이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덜하지 않다.


관록? 굳세고 균형이 잡힌 어른? 상상의 동물이거나 천연기념물 같은 개념과 존재 아닌가?


일을 못한다는 소리는 어디서 들어본 적 없지만 싸가지 없다는 소리는 많이 들은 지난 십여 년간 나는 길게는 몇 년, 짧게는 일주일 만에 직장 때려치우기를 반복했다. 몇 달 전 마지막 직장을 관두고 나서 지금은 놀고 있다. 착실히 직장생활을 하는 어른이 있을 거라 기대한 자리에는 여전히 길을 잃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는 어른이가 대신 앉아 있다.


요컨대 나의 삼십 대는 스물셋의 내가 기대했던 모습과 딴판이다.


그렇다면 나는 인생 헛산 걸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나.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 실패했나. 몇 달간 이 질문에 매달렸다.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학창 시절 모범생 소리를 들으며 자란 사람들이 지닌 치명적인 약점을 나도 갖고 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그 누구보다 호되게 스스로를 꾸짖는 아주 못된 습관. 그 습성을 내재화한 성실한 모범생은 한 발 더 나아가 스스로의 기대에 자신이 미치지 못했을 때 스스로 가스라이팅을 숨 쉬듯 한다. 99점을 맞은 시험에서 왜 100점을 못 맞았냐고 야단친다. 100점을 맞아도 칭찬하지 않는다. 그건 당연한 일이니까. 다음 시험에서 또 100점을 맞는 게 중요하니까. 아무리 잘해도 그보다 더 잘해야 하니까. 그러다 보니 감사할 줄 모르고 만족할 줄 모른다. 완벽하고 싶다는 욕구는 그 사람의 자신감과 기백을 꺾어놓고, 마치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아귀처럼 종국엔 스스로를 잡아먹게 만든다. 완벽주의는 완벽하게 사람을 망가뜨린다.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완벽주의를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한다. 기대했던 서른 중반의 어른이 되지는 못했어도, 그래도 썩 괜찮은 삶을 살아왔다고. 인생은 객관식이 아니라 주관식이라고. 인생은 시험이 아니라고. 그럼 인생은 뭐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산 인생이지?


엊그제 사우나를 하며 땀을 한 바가지로 흘리며 결단을 내렸다. 지금껏 살면서 나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것은 배움 아닐까. 나는 뭔가를 배우는 걸 좋아하고 보람 있어하는 사람이니까. 배움을 인생 항로의 척도로 설정해 보고, 내가 그간 배운 게 무엇인지 다 써보기로 했다. 비록 내가 기대하던 서른 중반은 되지 못했더라도, 그간 내가 배운 게 무엇인지 적어 내려가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했고, 왜 내가 기대했던 모습이 되지 못했는지, 애초에 내가 기대했던 모습이 타당하기는 했던 건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지금 인생이라는 망망대해 어디쯤에 있는지 좌표를 찍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시작한 것이 이 연재다. 불특정다수의 독자를 위해 쓰는 거라기보다는 내가 정신줄을 부여잡고 살아가기 위한 용도다. 스스로 야단치고 가스라이팅 하는 걸 멈추기 위해서. 자신을 긍정하는 연습을 하기 위한 기록. 세상을 살며 내가 배운 것들을 기록하면서 그래도 참 잘 살아왔다, 대견하다는 칭찬을 나 자신에게 해 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쓰는 그런 기록. 그 과정을 통해 내가 나라는 인간을 좀 더 잘 이해하고, 나 자신과 화해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이 배움의 기록을 딛고 서서 조금 더 가볍고 자유로운 존재로 살 수 있게 스스로를 놔주고 싶다.


내친김에 범위를 넓혀, 머릿속에 박힌 가장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기로 했다. 네 살 배기였을 때 얻은 교훈, 언어가 어떻게 관계를 설정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여섯 살에 깨달은 한국의 해묵은 남아선호사상과 남녀차별에 대해.


다음 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