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보내는 이별
네? 뭐라고요…?
머릿속에 H의 이름이 떠올랐지만, 그 순간 모든 소리가 멀어지며 사라져 버린 듯했다. 어둠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그날은 2012년 10월 15일, 평범한 월요일 저녁이어야 했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매일 세 시간이 넘는 출퇴근길의 동반자, 8100번 광역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지루하면서도 익숙했던 그 길은 하루의 끝을 마무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S 언니의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사적인 연락이 거의 없던 터라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그 한마디가 나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H가 죽었대...
손이 떨리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과 숨이 막히는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분당행 버스를 타고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무색하게 느리게 흘러갔다. 언제나 익숙했던 장면들이 그날따라 낯설고 슬프게만 보였다.
거제도로 향하는 밤새의 여정. 새벽의 차 안에는 깊은 침묵만이 감돌았다. 차창 너머로 잠잠한 풍경이 펼쳐졌고, 그곳은 마치 그의 마지막 숨결을 나누는 자리인 듯했다. 도착해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그의 아내가 우리를 맞이했다. 그의 영정 사진이 걸려 있었고, 그 안의 그는 마치 먼 곳을 바라보는 듯 생소하고도 쓸쓸한 표정이었다.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보내는 이별이었다.
H는 늘 열심히 살았다. 내가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4년이 되던 해, 새 회사에서 만난 동료였고, 그는 결혼해 아이를 키우는 가장이었다. 첫인상은 고집스러워 보였고, 돈에도 깐깐해 호감은 아니었지만, 책임감 있는 모습은 또래보다 성숙하게 느껴졌다. 가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어 했지만, 그런 강한 열망은 때때로 동료들과의 관계를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4년 후, 그는 다른 팀으로 옮겨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힘들어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다시 마주친 그는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다. 예전의 생기 있던 눈빛은 깊은 무기력으로 변해,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안타까웠다. 함께 커피를 마시며 나는 그에게 무심코 위로의 말을 건넸다. 무기력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다른 시도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조언했지만, 그 말이 오히려 그의 마음에 상처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나의 관점에서만 해결책을 제시했던 것이다. 내가 건넸던 위로는 결국 ‘도움’이라는 이름의 잔인한 충고였음을, 그가 떠난 후에야 깨달았다.
그는 결국 병가를 내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의 마지막 소식을 들은 날, 짧은 안부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 메시지는 끝내 읽히지 않은 채로 남았다. 숫자 ‘1’이 사라지지 않는 화면 속에서, 나는 영원히 답을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안부 궁금해서 연락드렸어요.
건강하게 잘 회복하시길 바라요.
그가 떠난 뒤, 나는 마지막 대화들을 곱씹으며 자책했다. 그때 내가 한 말들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의 쓸쓸한 눈빛과 목소리는 여전히 내 안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너무나 평범하고 열심히 살던 사람이 모두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우울증을 앓은 채 세상을 떠난 것을 지켜본 순간, 그가 내게 ‘누구나 마음의 병을 앓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남겼다. 그때 “나도 예외가 아니다”라는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였다. 시간이 흘러도 그의 존재는 잊히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떠오르기를 반복하며, 마음의 병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깊이 뿌리내릴 수 있는지 알게 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고통까지 살피려 노력한다. 나와 주변 사람들 중 누군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알아차리고, 힘들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게 돕고 싶다.
우리는 모두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짐작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고 믿기에, 앞으로도 그 예의를 지켜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