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윤새 2

by 강소하

갈피는 어찌저찌 잡혔다. 갈팡질팡 길을 걷다가 지쳐 쓰러질 바에는 아무 나무 밑에서 널브러지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해 쓰러지려던 윤새를 경식이 붙잡은 것이다. 경식은 윤새가 사진관에서 일하기 훨씬 전부터 광장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던 광명 안경원의 주인장이었다. 사실 이렇게 정없이 설명할 수만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윤새가 사진관을 찾기 전, 그러니까 이 거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 꺼지기 직전이었던 윤새의 목숨을 붙여 둔 사람이었다. 그는 등은커녕 발 붙일 곳도 없어 비쩍 말라 있었던 열일곱의 윤새를 이유 없이 주막으로 데려가 따뜻한 국밥을 한 그릇 사 주었다. 그날 먹은 국밥의 맛을 윤새는 잊을 수 없었다. 허겁지겁 국물을 들이키느라 입천장을 다 데었던 것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밥그릇을 싹싹 비우도록 경식이 검은 속내를 드러내기만을 기다렸지만 그는 정말로 국밥만 사 주고 떠났다. 자기 앞에서 굶어 죽었으면 발 뻗고 못 잤을 거라는 말을 하면서 자기 갈 길을 갔다. 다소 뻔뻔한 작별 이후로 그는 사진관에 일자리를 구한 윤새와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안부 인사를 시켰다. 제 살 길 찾기에도 바쁜 세상일 텐데 십 년이 지나도록 경식은 윤새를 곱게 지나치지 못했다. 어떤 날은 사진관의 상황을 물어보는가 하면 다른 날은 챙겨 줄 것도 아니면서 덤으로 윤새의 상황까지 물어보았다. 윤새는 경식이 한물 지난 인심이라는 것에 여즉 낭만을 품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왜, 나이 든 사람들은 살면서 믿어 온 가치를 쉽게 져 버리지 못한다고들 하지 않는가.

그러나 지금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인심 같은 알량한 관습이나 따뜻한 추억을 손쉽게 짓밟을 수 있는 그런 시대였다. 엎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워 주면 그 틈을 타 누군가 내 뒤통수에 총부리를 들이밀 것이고 내가 일으켜 세운 사람은 나를 돕지 않는 것이 아주 당연해진 세상이다. 새로운 이치가 생긴 것이다. 그러니 모두가 처음부터 넘어지지 않을 수밖에.

늘여서 이야기했지만 결국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게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밥 한 번 사 준 이후로 실질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식이었지만 윤새는 다시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그가 밥풀 한 톨이라도 던져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의 질문에 성실히 답했다. 잘 살고 있어요. 사진관은 좀 어렵고요. 손님은 평소랑 같죠, 뭐. 둘 중 하나예요. 열심히 돈을 모아 온 사람들이나 별 생각 없는 갑부들이 와요. 윤새는 경식이 안부를 물을 때마다 대강 이런 내용의 문장들을 순서만 바꾸어 말했다. 경식은 윤새의 노골적인 무성의를 눈치 채지 못하고 늘 고개를 끄덕이고 떠나갔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윤새는 뒤에서 누군가가 밀고 있는 것처럼 발을 질질 끌며 뒷골목을 헤매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광장으로 나가 입에 넣지도 못할 색빙수를 마주하는 것보다는 아무도 없는 뒷골목을 처량하게 기어다니는 것이 백 배 나았다. 품속의 돈은 방을 구할 때 모두 써야 할 테니 지금 당장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차라리 덜 힘겨웠다. 눈 딱 감고 사진관으로 돌아가 빌어 볼까 하는 충동도 들었지만 다시 쫓겨나는 수고스러움을 감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성의 뒷골목에서는 그늘이 될 만한 나무를 찾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윤새는 기대어 쉴 만한 곳만 나타나면 당장 드러누워 버리겠다고 다짐하며 다시 한 걸음 나아갔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해가 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직 밝지만 조금 푸르스름해진 하늘에 달이 하얗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윤새는 달만 보면 오묘한 기분이 피어올랐다. 모두가 떠나갈 때도 진득하게 그를 따라온 존재 아닌가. 모든 순간을 함께하면서. 윤새는 몇천 년 전부터 이 땅을 바라보고 있었을 그 존재가 말이라도 시킬 것처럼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사 안 하냐?”

뒤에서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굶주린 윤새는 크게 놀라지도 못하고 기운 없이 ‘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뿔테 모양 안경을 쓰고 두루마기를 걸친 경식이 뒷짐을 지고 우뚝 서 있었다. 윤새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놈의 인사 저는 언제쯤 먼저 받는답니까.”

"어허어. 누가 어른한테 먼저 인사를 받나?"

"아무리 어리더라도 반가운 사람이면 먼저 인사할 수 있지요."

윤새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렇게요."

“예끼, 어른은 근육이 굳어서 고개를 바로 못 숙인대도.”

“손님한테는 잘만 숙이시던데.”

경식은 윤새의 말을 무시했다.

“어떻게 지내냐.”

“잘 살고 있어요. 사.......”

물 흐르듯 나오려던 다음 문장에서 윤새의 혀가 굳었다. 말을 지어 내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경식이 대신 문장을 끝맺어 주었다.

“사진관에서 쫓겨났다고 들었는데.”

“조선 사람 일자리 잃었다는 게 큰 일이라고 시장 반대쪽까지 소문이 나나요. 예, 쫓겨났습니다. 소문 참 빠르네. 일본 상인들이 판을 쳐서 상점들 파리만 날린다더니, 사람들 할 짓도 없나 보지.”

고개를 숙이고 툴툴거리는 윤새에게 경식이 딱밤을 먹였다. 도끼눈을 뜨고 물러나는 그를 보며 경식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할 짓 없어도 일자리 잃은 윤새 너만 하겠어?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설명이나 해 봐라. 사진관이 장사 접는 건 아닐 테고.”

“같이 일하는 사람이 암막실을 뒤집어 엎고 도망갔습니다. 저는 그걸 못 잡았고요. 안 그래도 경영난이었던 사진관 인력이라도 줄여 보려고 이참에 쫓아낸 거겠죠.”

“뒤집어 엎은 이유는 알고?”

“모릅니다. 4년 넘게 같이 일하면서 답답할 때는 몇 번 있었지만 이런 파격적인 방식으로 그 사람이 퇴직할 줄은 몰랐네요.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게 중요합니까. 내 사진관 아니니까 상관도 없고, 더 생각해 봤자 화만 나고. 생각 안 하렵니다.”

“그런데 너는 언제까지 나한테 그렇게 딱딱하게 말할 거냐?”

“뭐, 딸마냥 살갑게 어깨라도 주물러 드릴까요.”

“그 자리는 우리 우진이가 채 갔으니 너는 들어오면 알아서 공석 찾아봐라.”

윤새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는 이런 부류의 대화법을 아주 싫어했다. 당황스러운 반응이 나오게끔 수수께끼를 던져 놓고 알아서 답을 찾아보라는 방식의 대화가 부담스러웠다. 아니, 어쩌면 두 번째로 받은 이유 없는 호의가 부담스러운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잠시 고민했던 것은 10초 뒤의 미래를 보아서였을까. 당황할 사람은 윤새가 아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결정할 것은 하나였다. 퍼드득 놀라며 ‘들어오라뇨?!’ 하고 외칠 것인가, 황송한 표정으로 ‘들어...... 오라뇨?’ 라고 물어볼 것인가.

윤새는 속임수를 택했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서서 보란 듯 비척거리며 얼마 못 갈 걸음을 떼었다. 정확히 10초 뒤 경식이 다급하게 외쳤다.

“윤새야, 안경점에서 일해라!”



하고 싶은 일로 벌어먹고 사는 게 어디 쉽겠는가. 그러나 윤새는 광명 안경원 앞에 서 있는 진운의 얼굴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하고 싶은 일로 벌어먹고 사는 건 당연히 쉽지 않다. 그러나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도 모자라 보기 싫은 얼굴까지 보며 벌어먹고 사는 건 한마디로 불가능하다.

진운이 평온한 얼굴로 진열대에 각양각색의 안경집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는 윤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시뻘겋게 물드는 것을 보면서도 안경집 안에 담을 안경테를 세심하게 닦는 투철한 직업 정신까지 보였다. 윤새는 앞의 진운과 옆의 경식 중 누구의 멱살을 먼저 잡아야 할지 알 수 없어 어지러웠다. 그의 고민을 읽은 듯 경식이 다급히 윤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김진운, 들어가 있으랬잖아. 지금 둘이 서로 봐서 좋을 게 뭐 있어? 천천히 상황을 설명하고 인사시킨대도.”

“우리는 살갑게 자기소개하고 모였답니까. 여기가 학교도 아니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진운이 안경테를 내려놓고 대답했다.

“이 사람 눈에 다른 동지들 목숨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좀 살가워질 마음이 드냐?"

“예,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은.”

의외로 쉽게 나온 대답에 경식은 조금 놀란 듯했다. 진운은 식은 곰탕 같은 눈을 하고 윤새를 쳐다봤다. 윤새는 뜨뜻해진 동치미 국물 같은 눈으로 시선을 되받아쳤다.

“김진운입니다.”

“모르는 걸 알려 줘야지, 이놈아. 너랑 4년을 일했는데 설마 그걸 모르려고. 도움도 안 되니까 들어가 있어라. 아니다, 나가 있어라. 윤새는 들어와서 나랑 이야기하자.”

항변할 줄 알았던 진운은 순순히 안경원을 나갔다. 윤새는 진운이 가게를 나가 미닫이문을 닫을 때까지 그의 코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경식은 망부석처럼 서서 움직이지 않는 윤새를 손님이 상담할 때 앉는 의자에 앉혀 놓고 진열대 뒤로 들어가 섰다. 이따금씩 유리창으로 사람이 지나다니는 바깥을 살피는 것으로 보아 손님과 주인장이 대화하는 모양새를 만들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진운이 군소리 없이 나간 것 또한 바깥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일 것이다. 눈짓도 신호도 없이 일사천리로 본인의 역할을 이행한다는 것은 둘이 오래도록 마음을 맞춘 사이라는 뜻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윤새의 마음 한 구석을 어떤 감정이 거슬릴 정도로 툭툭 건드려 왔다. 낯설지만 처음 느끼는 감정은 아니었다. 이건 문틈 사이로 가늘게 보이던, 윤새를 다른 방으로 보내 놓고서 성천이 마주보고 두런두런 대화하던 그 사람의 뒤통수를 볼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결국 이름조차 알지 못하고 사라진 그 사람. 스스로를 그 사람 안에 집어넣어 보고 나서야 자신은 절대 그 사람이 될 수 없다고 깨달은 뒤 느꼈던 실망과 당혹이다. 끝맛이 쓴 감정이다.

경식의 목소리가 사념에 빠진 윤새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10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으냐?”

“제가 여길 뛰쳐나갈 것 같습니다.”

“눈을 감고 보이는 대로 말해 봐.”

“어떻게 아셨습니까?”

“무엇을. 네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

“.......”

“그게 아니면, 네가 그 뒷골목에 있으리라는 것?”

“그것까지 미리 알고 오신 줄은 몰랐는데요.”

“몰랐겠지. 네가 10초 뒤를 볼 수 있는 거지,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경식이 진열대 밑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쿵 닫히는 소리가 났다.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낸 것 같았다. 윤새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경식의 손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진열대 위에 약과 다섯 개를 툭 올려놓았다.

“단 걸 먹여 놓아야 뭐라도 들을 것 같아서.”

윤새는 대답하지 않고 약과를 한 입에 넣어 씹기 시작했다. 삼키기 전까지 영양가 있는 대화를 시작하지 않으면 일어나 다시 골목을 기어다닐 작정이었다.

“네가 미래를 본다는 것만큼이나 허무맹랑한 이야기니까 잘 들어.”

경식이 운을 떼었다.

“듣다가 끊으면 윤새 너만 손해다. 이 이야기는 흐름이 중요하거든. 내 나이가 나이인지라 어디까지 말했는지 잊어먹으면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그건 너도 싫지?

자아, 어디서부터 시작해 볼까. 별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자. 별님들이 우리 세상에 아주 관심이 많다는 사실은 아나? 당연하지. 별님들의 세상은 천년만년이 흘러도 변함이 없거든. 계신 세상이 지루하니 밑에 있는 우리들 세상으로 눈을 돌리는 거야. 재미난 이야기 구경하듯이 말이다. 우리에게도 각자 좋아하는 전래동화가 있듯이 별님들도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세상이 있다. 그중에서도 여기 조선을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별들이 있었지. 하나가 아니라 일곱씩이나. 너도 들어 본 별이야. 감이 잡히지? 이 땅을 북두칠성이 사랑하고 있어. 이 땅을 일곱 개의 별이 사랑하고 있다. 땅덩어리뿐 아니라 그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 사랑하고 있지. 그러니 우리가 모든 걸 짓밟히고 빼앗기는 걸 보며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

윤새 너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심장을 내놓을 수 있나? 나는 별들의 사랑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 별들은 그럴 수 있었나 봐. 그들은 죽어가는 조선을 두고 볼 수 없었어. 그래서 자기들의 반을 찢어서 땅으로 내려보냈다. 그날 쏟아진 별똥별이 매우 아름다웠다지. 허무맹랑하지? 어린애 재우기 전 심심풀이 땅콩처럼 들려줄 만한 생뚱맞은 이야기를 왜 내 앞에서 떠벌리나 싶겠지. 하지만 성윤새 네가 바로 이 이야기의 증표야. 그 일곱 개의 조각들 중 하나가 네 심장 안에 들어 있어. 네가 미래를 볼 수 있는 이유야. 나머지 여섯 개의 조각에도 다른 능력들이 깃들어 있어. 우리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칠성'이라고 불러.

그런데 바로 여기서 일이 꼬인 거다. 그 조각이 ‘나 여기 떨어지겠소’ 말하고 조선 땅에 떨어지는 게 아니잖아. 조각을 품고 태어난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단 말야. 그렇다고 능력 가진 사람을 찾겠답시고 조선팔도에 전단지를 뿌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그러니 별 수 있나, 발로 뛰어 찾아야지. 별이 내려 준 운명을 믿으면서 말이야.

다행히 몇십 년 전부터 칠성을 찾아온 자가 있었어. 그 사람이 온 세상 신문이란 신문이며 소문이란 소문에 사람이란 사람...... 아이고, 숨차다. 하여튼 한마디로 조선팔도를 뒤져서 칠성이라 추정되는 자들의 목록을 추려 놓았다. 덕분에 나도 그 사람들을 모아 수월하게 월성회를 꾸릴 수 있었어. 아, 네가 들어와 있는 이곳이 월성회다. 별의 조각을 품은 자들이 모인 곳. 낮에는 안경원을 하고 있지만 밤에는 작전실 겸 숙소로 쓰고 있다고 보면 된다. 다섯 동지가 함께하고 있었는데 이제 여섯이 되겠네. 너까지 합해서.”

긴 이야기를 끝낸 경식은 이제 입을 열어도 된다는 듯 윤새에게 손짓했다. 마침 마지막 약과를 씹어삼킨 윤새는 간결하게 말했다.

“다 좋습니다.”

“다행이다. 그러니 너도 어서 일을 배우자.”

“그것 빼고는 다 좋습니다.”

윤새는 조금 진득해진 손을 탁탁 털었다.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저씨 말대로 눈만 감으면 미래가 보이는 게 저인데 설마 거짓말이라 생각하겠습니까. 다만 두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저에게 일을 배우라는 건 광명 안경원 직원뿐 아니라 월성회 단원으로도 활동하라는 뜻이지요?”

“그렇지, 정확히 해 두는 게 좋겠지.”

“그렇다면 하고 싶지 않습니다.”

화들짝 놀라며 역정을 낼 줄 알았던 경식은 윤새와 차분히 눈을 맞추며 물어왔다.

“이유는?”

“목숨이 소중해서요.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여기 오기 전에는 깊은 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때도 고아였지만 거두어 준 어른은 있었습니다. 그 분도 아저씨와 비슷했어요. 너무 어렸을 적이라 기억이 흐릿하지만 조선을 구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하셨어요. 중요해 보이는 봉투도 전달하셨고 커다란 짐을 가지고 나흘 정도 멀리 떠나셨다가 빈손으로 돌아오시는 날도 많았습니다.”

윤새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말을 멈추었다. 경식은 말을 얹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윤새는 낯설게 가라앉은 모습이 과연 그의 본모습일지 고민하다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은 홀로 경성에 와 있으니 어떻게 되었는지는 말 안 해도 아시겠지요. 저 대신 총을 맞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셨습니다.”

“네 대신이라고.”

“제가 없었다면 더 빨리 달리셨을 분이니까요.”

경식은 팔짱을 끼고 고민이 그득 담긴 숨을 뱉었다.

“은인이 살려 놓은 목숨이니 아껴야 한다는 말이군. 이해하고 말고. 하지만 말이다, 윤새야.”

그는 윤새의 가슴 왼편을 가리켰다.

“그 안에 뛰고 있는 건 네 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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