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이 안경원을 나서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였다. 그는 윤새가 손을 들어 화답하는 것을 보고 묘하게 안심하는 표정으로 나갔다. 그 뒤를 명원과 경식이 따랐다. 우진은 곁눈질로 윤새를 흘끔거리며 용맹이를 안고 나왔다. 품에 가득 찰 정도로 덩치가 큰데도 그는 늘 용맹이를 끌어안고 나갔다. 간밤의 잊고 싶은 일이 신경 쓰여 그대로 나가게 둘까 고민했으나 작전에 나가는 사람을 배웅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윤새는 낮게 헛기침을 하며 우진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우진은 황급히 고개를 꾸벅 숙이고 허겁지겁 안경원을 나갔다. 마지막으로 남은은 사람은 진운이었다.
“저기요.”
그를 지나쳐 가는 진운을 향해 윤새가 툭 뱉었다. 먼저 말을 건네는 것은 굽히는 것과 엄연히 다르다. 둘의 관계를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끌어내린 것은 진운이 분명하니 윤새가 그를를 없는 사람 취급하더라도 정당하다. 하지만 진운이 사진관에서 벌인 일에 대한 명분은 충분하지 않은가. 월성회는 오로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만들어진 조직이니까. 진운은 처음부터 잠입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진관에 들어왔다. 대문 앞에 쓰러져 있었던 그를 끌고 들어간 것은 어디까지나 윤새의 선택이었다. 그 앞에 쓰러져 발견되는 것도 진운의 계획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하지만 진운은 더한 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목숨을 걸고 작전에 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안경원에서 처음 진운을 보고 분노가 차올랐던 것은 사진관에서 구르며 견뎌왔던 시간들이 통째로 날아갔다는 게 그제서야 실감이 났기 때문이다. 불미스러운 일로 쫓겨났으니 10년 동안 일했던 경력이 물거품이 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며칠 뒤 부글부글 끓던 분노가 가라앉았을 즈음 가만히 앉아서 생각했을 때 그 이유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진운과의 관계가 아쉬운 것은 아니었다. 서운하거나 섭섭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진운의 얼굴을 볼 때마다 드는 끝맛이 씁쓸한 감정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윤새는 꽤나 오랜 시간 고민했다.
충격적이다. 윤새는 그렇게 정의하기로 했다. 시답잖은 이야기 한 번 못 해 보았던 사이니 진운과 친구였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함께 일을 이어갈 수도 있는 동료로 여겼겼던 진운이 윤새의 삶에서 송두리째 뽑혀나간 것은 매우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전혀 소중하지 않은 존재라면 사라지더라도 충격 받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왜였을까. 윤새는 천천히 뒤돌아보는 진운을 덤덤하게 쳐다보았다. 왜긴, 껍데기뿐인 대화에도 정은 붙나 보지.
“죽지는 말고.”
윤새는 애매하게 문장을 맺었다. 그 뒤에 덧붙일 말은 생각해 두지 않았다. 잘 가라고 말하기에는 가는 곳이 너무 위험하고, 다녀오라고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정이 붙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러니 최악을 면하자고 말하는 수밖에.
“잘 보고 있어요.”
진운은 짤막하게 답하고 떠났다. 윤새는 캄캄해진 안경원에 홀로 남았다. 그는 숨을 참고 귀를 기울였다.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그는 침묵 속에서 나직하게 뱉어 보았다. 안경원에 들어오던 날부터 윤새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질문이었다.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할 질문이었지만. 매일 복닥거리며 움직이던 사람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사라져서 그런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는데도 말끝이 웅웅 울렸다. 윤새는 잠시 숨을 참고 가게 안을 가득 채우는 침묵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다시 중얼거려 보았다.
“어떤 마음일까.”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나서는 그 마음은. 자신의 가족도 소유도 아닌, 어쩌면 이미 사라져 버린 나라에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그 마음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세상에 태어나 자신이 잃어버린 것도 아닌닌 조국을 지키는 마음은. 그들은 끝을 알고 있는가. 누구보다 따뜻하게 답해 주었을 단 한 사람은 그날 절벽 밑으로 사라졌다. 그들과 같은 마음을 품은 채로. 윤새는 마지막 순간까지 뜨거웠던 그 눈동자를 꿈이라도 좋으니 다시 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보아야 할 때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천천히 뜬 윤새의 눈이 하늘에 뜬 달처럼 푸르게 빛났다. 여전히 어둠이었다. 달려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직 바깥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의자에 늘어지듯 기대어 창밖을 쳐다보았다. 밤하늘 위에 달이 둥둥 떠 있었다.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 그 주변에 점점이 박혀 있는 별들도 차츰씩씩 시야에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흔들리던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윤새는 눈을 다시 감았다 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잠시 지금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다.
안경원이 사라지면 갈 곳이 없다. 혹시라도 명원이나 영원이 사라진다면 적어도 2년, 아니 5년 동안은 마음이 아플 것 같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경식이 사라지는는 것은 이미 보았다. 그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사라지는 형태는 죽음 하나가가 아니다. 지금 한 생각은 경식이 평생 모르도록 할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진이 사라져도 마찬가지다. 명원과 영원이 사라지는 것만큼 아플 것 같다. 5년은 떠오를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성천은 14년이 지난 지금도 그리운데. 평생을 가는 게 있다면, 그건 성천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운은 어떠한가. 윤새는 그에게 죽지 마라고 했다. 진심이었다. 사진관에서 보낸 시간도 있으니 그가 사라진다면 꽤 오래 아플 테니까. 5년까지는 아니더라도, 4년.
그렇다면 이런 마음이라도 괜찮은가?
이런 마음이라도 충분한가?
아무 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