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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달하는 정은 Oct 01. 2021

엄마의 경계선

경계가 명확한 엄마



아이에게 대체적으로 상냥하다. 화를  때도 있지만 아이는 능글능글  넘기고 주눅 들지 않는다. 우리 사이에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아이는 씩씩하고 주도적이다.



가끔 아이가 호기롭게 '내가 할게' 하던걸 못해내서 시무룩할 때, 별것 아닌 것으로 떼를 쓰다가 감정 폭풍에 휘말려 스스로 울음을 멈추지 못할 때, 내 마음도 요동을 칠 때가 있다. 같이 괴롭고 슬프다.



아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공감하는 것은 안정적 정서의 토대를 형성하고 스스로 감정조절하는 법을 배우는 데 필수적 요소다.



이해와 공감은 하되 동화되어 나의 감정과 뒤섞이면 안 된다. 아이의 감정이 내 감정이 되는 순간 이것은 조절되지 않고 폭주하는 기관차와 같아진다. 목적지도 없이 나아가다가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는 것으로 끝난다. 이 과정에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어른으로서 아이가 겪는 감정을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해 주되,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지금 일어나는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내 안의 미숙한 아이가 보호자의 임무를 망각한 채 전면에 등장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부모의 훈육이란 내 안의 아이를 다스리는 것부터이다. 그러기 위해 나와 아이의 경계는 명확해야 한다.



아이와 놀 때 나는 친구 같은 엄마가 된다. 내 안에 웅크려있던 아이가 진심으로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즐긴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어른이자 보호자로서의 나는 아이에게 위험한 상황이 오지 않는지 끊임없이 살핀다. 친구처럼 놀아주기도 하지만 본질은 보살피는 어른이자 보호자인 것이다.



욱 하는 순간 내 안의 아이를 제압하는데 실패했음을 느낀다. 겉모습은 어른이지만 유아적 사고로 아이와 맞서는 것이다. 엄마로서 내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슬아슬 경계선을 넘는다.



경계를 지킨다는 것은 어른으로서 필요한 보살핌을 제공하고 부모 다움을 지키는 것이다. 또한 아이와 나를 분리할 줄 아는 것이다.



이 아이는 나에게서 나왔지만 내가 아니다. 작은 내 분신이 아니다. 지금은 보살핌이 필요하지만 때가 되면 나를 떠날 것이다.



분명 내 눈에는 지름길, 꽃길이 보여도 아이는 자신의 의지로 가시밭길을 선택할 수 있다. 나에게 소중한 아이지만 나와는 분리된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한다면 안타까울 순 있겠지만 결국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 줄 수 있다. 선택에 대한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담담할 수 있을 것 같다. 힘들 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만 책임은 아이 스스로 지는 것이다.



요즘은 우리 때와 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놀이하고 학습하는 아이들을 보며, 내가 알고 있는 질서와 방법이 이 아이들에게 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물론 인간으로서의 도리, 사람과 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내 생각은 한결같다.



아이에게 부모로서 필요한 양육과 돌봄, 훈육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아이의 성장, 발달에  따라 역할과 영향의 범위를 유연하게 조정해 나가야 한다. 유연하고 탄력적이면서 명확한 경계를 가진 엄마가 되는 것이다.



나로부터 태어난 자식이라 해도 결국 남이다. 이러한 경계를 명확히 해야 관계가 건강히 커갈 수 있다. 너 나 구분 없이 얽히면 정체성이 혼미해지고 가족 내에서 감정이 얽히고설켜  엉망진창이 되기 싶상이다.






아이가 호기심 딱지를 한편만 보기로 했는데 한편 더 보고 싶다고 떼를 쓰면, 약속을 상기시키며 안된다고 규칙을 가르쳐 주는 것은 부모로서의 나다.


그런데 아이의 징징거림이 지속되면 화를 참지 못하고 아이를 비난한다. 한편만 보기로 했는데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 이렇게 할 거면 다음에는 아예 보여주지 않겠다, 라는 협박 같은 훈계. 이건 내 화의 다른 표현이다. 내 안의 아이가 화를 내는 것이다.


'왜 내 말 안 들어, 너의 떼가 나를 화나게 만들었어.' 이때의 나는 보호자라기보다는 아이와 다투는 또 하나의 아이와 같다. 보호자로서의 나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내가 과연 어른으로 이야기하고 있나, 훈육을 가장하여 어른의 모습 안에 숨은 아이가 되어 소리치는 것인가, 바로 후자다.



늦은 밤 낮의 장면을 곱씹어 볼 때 '그래 그럴만했어.' 하면 훈육이고 '아, 왠지 부끄럽다' 할 때는 아이 같았던 내가 있다. 


위험에 처할 수 있는 행동, 예를 들면 횡단보도를 건너거나 차가 수시로 드나드는 주차장에서 잡은 내 손을 뿌리치고, 안된다는 이야기를 무시하면 화가 난다. 아이에 대한 염려와 사고에 대한 불안이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장면에서 낸 화는 후에 생각해도, 좀 덜 흥분할걸 하는 생각은 들지만 아이에게 미안하거나 부끄럽지는 않다.



하지만 아이와 말꼬리를 잡으며 논쟁을 하다가 결국 엄마의 권위로 제압한 날은 말싸움으로 아이를 이기려 했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럽다.


그때의 나는 아이가 되어 싸우다가 결국 권위를 무기로 아이를 누른 것이다. 엄마의 권위와 어른의 논리 앞에 아이는 나에게 항복하지만, 이것은 어른인 내가 마음으로 설득하고 가르쳐준 게 아니라 내 안의 아이가 비겁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때 나는 어른이 아닌 아이다. 어른이자 보호자로서의 경계가 무너진 것이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모든 일에 해탈한 듯 욱 하지 않고 언제나 엄마의 본분을 잊지 않는 훌륭한 어른이 될 자신은 없다. 이렇게 하루를 돌아보며 반성할 일은 반성하고 내일은 화내지 않고 차분하게 설명하고 알려줘야지, 하고 다시 다짐할 뿐이다.



매일매일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큰 아이는 나와 논쟁을 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합리적으로 반박할 나름의 논리를 갖출 것이고 무엇보다도 제 또래들, 자신의 세계에서 독백을 하는 게 편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또 지금이 그립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 별로 화날 것도 없을 것 같다.



감정적 경계. 아이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기, 공감은 하되 동화되어 같이 감정 폭풍에 빠지지 않아야 아이도 나를 통해 고조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감정 조절하는 방법을 익혀갈 수 있다.

엄마로서 역할의 경계. 아이의 행동에 욱해서 제압하려는 말싸움 하지 않기. 이것은 어른으로서의 내가 아닌 내 안의 아이가 전면에 나서 아이와 싸우는 것과 다름없다.






아이는 감정적으로, 시간적으로 나에게 경계를 두지 않는다. 아이는 내게 감정을 마구 퍼붓고 나의 시간을 자신의 것인 양 침범한다. 나는 내 시간의 경계를 무시당하며 동시에 아이의 감정 주머니가 되기 일쑤이다. 특히 졸리거나 피곤하면 불편한 감정을 거칠게 쏟아낸다. 평소에 잘 지키던 규칙들을 다 어기고 알려주면 서럽게 울고 떼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이다. 일단, 피곤하고 잠 못 자고 배고픈 아이라면 불편한 감정 덩어리 그 자체일 뿐, 언어로 소통할 수 없다.



생활하면서 겪는 사소한 감정적 불편함(학교에서 훈계를 듣거나 친구와 싸움)이 있을 경우 "이러이러해서 기분 안 좋아"라고 표현하기보다,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 무리한 요구를 하다가 거절하는 순간 이전에 쌓여있던 불편한 감정을 나에게 쏟아낸다. 아직 감정을 다루는데 미숙한 아이가 감정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형태이다.



이럴 때 나는 '아이들이 엄마와 자신을 하나로 보는구나,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전이해도 되는 존재로 생각하고 감정적 경계를 만들지 않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오늘 기분 나쁜 일이 있었나 보네, 그래도 엄마에게 너무 화내지 말아 줘."라고 타이르면 아이는 "그런 것 없는데"라고 하지만, 잠시 감정의 쉼표를 가지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한다. 나는 엄마의 경계를 지키고 내 감정도 지킬 수 있다.



아, 경계를 만들기가 참 힘이 드네요. 언제든 선을 넘고, 아니 경계선 자체를 인식 못하는 아이와 같이 살면서 혼자 선을 지켜나가는 건 가끔 억울하기도 하고 힘이 드는 과정이다.



엄마에게도 물리적 시간적 경계가 필요하다. 쉴 겨를, 재충전의 겨를, 나를 돌보는 시간,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시간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것도 필요하다.


"엄마가 혼자 할 일이 있네, 잠시만 기다려 줄래? 엄마도 충전해야 하거든." "엄마가 오늘 마음 주머니가 다 차서 계속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내면 화가 날 것 같은데 그만해줘."라고 정중하게 요청하기.



아이도 나를 찾지 않을 때가 온다. 그때, 그냥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영역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면서 건강하게 독립하는 과정을 거치면 좋겠다. 유연하지만 명확한 경계를 가진 건강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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