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방인 Oct 06. 2023

주산학원, 싸가지학원

우리는 학원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내가 이과를 선택해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것과 내 동생이 문과를 선택해서 사회학을 전공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아주 어렸을 적, 두 형제를 유심히 관찰하시던 아버지가 한참을 고민한 끝에 한 녀석은 주산학원을, 또 한 녀석은 웅변학원을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에 우리 형제들의 운명이 정해졌다는 것인데,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주장이다.


가족들이 모일 때면 반복되는 이 진부한 레퍼토리를 그저 그러려니 하고 가만히 듣고 있는 나와 달리, 동생 녀석은 이것저것 따져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모양이다. 근데 왜 하필 주산이랑 웅변이래요? 하나같이 요즘 세상에 쓸모없는 것들이네... 동생 녀석을 잠시 째려보시던 아버지는 이내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 인마! 그때만 해도 회사에서는 셈 빠른 놈이랑 남들 앞에서 말 잘하는 놈이 최고였어.


그 시절, 내가 굳이 어머니를 졸라 주판을 두 개 사달라고 한 것은 양 발에 끼워 스케이트 놀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불행히도 또래보다 셈이 빨랐던 기억은 없었고. 반면, 웅변학원에 다닌 내 동생은 나름 재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명절이 되어 일가친척들이 모이면, 아버지의 꼬임에 못 이긴 척 어른들 앞에 서서 "교통질서를 잘 지키자"는 등의 유치한 연설을 한바탕 늘어놓는 것이었다.


눈물을 훔쳐가며 박장대소를 하는 친척 어른들 앞에서, 한껏 고무되어 마침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펼치고 목이 터져라 "외칩니다!" 하며 피날레를 장식하면 어른들은 박수를 치며 저마다 지갑을 열어 용돈을 건네셨다. 그때 동생 녀석 얼굴에서 부끄러운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으니, 웅변학원에서 얼굴에 철판 까는 법 하나는 제대로 배운 것 같았다.




셈을 빠르게 하는데 흥미가 없었던 나는 1년도 못 가서 주산학원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를 그냥 놀게 내버려 두지 않았고, 이번에는 악필을 뜯어고쳐야 한다며 서예 학원에 보내셨다. 서예학원에서는 벼루에 먹을 갈고 화선지를 반듯하게 펼쳐서 커다란 글씨로 대한민국, 금수강산 같은 주로 4자로 된 글자들을 적어나갔다. 당시에도 왜 서예학원이냐고 아버지께 이유를 따져 묻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 시절 직장에서 만드는 모든 문서가 수기로 작성되었으리라는 정도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 주산학원이 위치한 아파트 단지 상가 건물에 컴퓨터 학원이 생겼다. 나는 컴퓨터 학원에 다니지 않았지만, 토요일 오후가 되면 컴퓨터 학원에 다니는 친구를 따라 학원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컴퓨터 학원에서 오락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학원이 주최하는 일종의 “오픈하우스”같은 행사였는데, 효과가 있었는지 주변에 컴퓨터 학원 수강생들이 점점 늘어갔다. 나는 어머니에게 컴퓨터 학원에 보내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다만, 다들 컴퓨터를 배우는 시대에도 여전히 주산학원이 성업 중이라는 사실이 (그것도 같은 건물에서) 조금 의아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20세기에 자녀를 키우신 부모님들의 생각은 이랬을 것이다. 계산을 잘하고, 글씨를 잘 쓰고,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발표할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할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 부모님 세대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세상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변했으니까. 학원에서 코딩을 배우고, 영어를 배우는 요즘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또 어떻게 변하게 될지 궁금할 따름이다.


회사 라운지에서, 웃으며 “안녕하세요!”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넨 옆 팀 팀장에게 보일 듯 말 듯 고개만 까딱 하고 휙 지나가는 신입사원을 보자니 헛웃음이 나온다. 민망함에 입이 삐죽 튀어나온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실없는 농담을 건넸다. “요새 싸가지 가르치는 학원은 없나보네요. 장사 잘 될 것 같은데.”

매거진의 이전글 공부가 즐겁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