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의 겨울은 다른 해의 겨울에 비해 덜 추웠다는 모양입니다. 저는 강추위에도 결코 패딩은 입지 않고, 옷을 여러 겹 껴입은 뒤 걸어다니는 걸 좋아합니다. 올해도 늘 하던 것처럼 그렇게 나다니는 와중, 바람이 무척이나 센 날이 있었습니다. 기온 자체와는 별개로 삭풍이 무척이나 강해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이러다 정말 바람에 날아가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멈춰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목적지로 가려면 계속 걸어야 하니 다리가 쉬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불현듯 든 생각이 '파이어 펀치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입니다. 조금 바보 같은 연상 과정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남들이 영감을 느끼는 것에 비하면 추운 겨울에 밖을 걷다 맥락 없이 떠올리는 건 초라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만, 이런 희미한 불씨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파이어 펀치'에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얼어붙은 세상을 녹일 펀치는 잔불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으니까요.
후지모토 타츠키는 2020년대 일본 만화계에 있어 최고 인기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의 비범한 센스와 훌륭한 작화가 어우러진 작품들은 독자뿐만 아니라 만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대표작 '체인소 맨'이 한창 인기가 있을 때는 네이버 웹툰에서 표절을 하고, 일본의 신인 만화가들이나 한국의 만화 창작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작품들에서 후지모토 타츠키의 향기를 심심찮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스토리와 정신 세계, 혹은 타 만화 작가에 비해 사실적인 이목구비와 얼굴 묘사를 추구하는 기조 등 후지모토 타츠키와 '체인소 맨'의 흥행은 크든 작든 만화 판에 있어 게임 체인저가 되었습니다.
그의 가장 큰 특징은 엄청난 영화광이라는 것입니다. 다양한 영화를 가리지 않고 섭렵하여 풍부한 식견을 갖고 있습니다. 만화 창작의 이유 중 하나로도 '영화는 혼자서 찍을 수 없는데 만화나 소설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서'를 들기도 했습니다. 후지모토 타츠키 본인에게 있어 막대한 지분을 차지하는 영화라는 요소를, 그는 작품 속에 아낌없이 나타냅니다. 그의 작품 속에는 다양한 영화의 패러디 장면이나 직접적인 언급이 산재해 있습니다.
대표작 '체인소 맨'을 예로 들자면, 배고픈 주인공이 식사를 할 때 소시지와 우동을 고르는 장면은 한국 영화 <황해>의 오마주입니다. 작중 살을 날리는 듯한 장면도 있는데, 그것은 마찬가지로 한국 영화 <곡성>을 오마주했다고 직접 밝혔습니다. 이외에도 작품을 뜯어 보면 수많은 영화 오마주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만, 제 영화적 식견이 부족하여 세세하게 다루기는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초창기 단편인 '약속의 나유타'나, '사사키 군이 총알 막았어' 등 제가 인상 깊게 본 작품에서도 확연히 느껴지는 특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화적인 플롯과 영화의 느낌을 만화에서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단편 만화는 장편 만화에 비해 현저히 적은 분량으로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지어야 하는 점이 두 시간 안에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하는 영화와도 닮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적인 느낌'이 더 잘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에는 아예 영화를 소재로 한 '안녕, 에리'를 그리는 등 후지모토 타츠키의 영화 사랑은 한 순간도 멈춘 적 없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 리뷰할 작품인 파이어 펀치에서도 영화의 오마주가 몇 번이고 나옵니다. 작품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경우도 있으며, 영화의 특정 장면에서 따온 듯한 부분도 있습니다. 특히 주간 소년 점프와의 인터뷰를 주목할 만합니다. 거기서 후지모토 타츠키는 '한국 영화 같은 만화를 그리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영화는 '추격자'였습니다. '영화 시작 30분만에 악역이 주인공에게 잡히는 전개가 펼쳐지며,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함의 연속이다', '한국 영화는 감독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지만, 끝까지 보면 이거다 싶은 느낌이 있다'며 '추격자'를 바탕으로 한국 영화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해당 인터뷰의 골자는 파이어 펀치가 추격자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는 점입니다. 적어도 본인이 인터뷰에서 직접 말한, '예상치 못한 전개가 펼쳐져 어떻게 될까 하고 매번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을 통해 그 영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회상 장면에서 그런 점이 잘 드러납니다. 주인공이 과거의 한 순간을 회상하는 것이 수 번에 걸쳐 나옵니다. 하지만 다른 만화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회상을 할 때마다 마치 다른 카메라로 촬영한 것처럼 이전과 다른 시퀀스를 보입니다. 구도와 대사가 바뀌는 것과 함께 주인공의 독백 또한 바뀝니다. 이런 연출은 출판 만화보다는 영화에 어울리는 연출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지모토 타츠키는 본인만의 색다른 방법론에 입각하여 데뷔작 파이어 펀치의 세계를 훌륭하게 묘사했습니다.
파이어 펀치로 장편 연재 만화의 문턱을 밟은 후지모토 타츠키는 온갖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는 연재 만화라는 링 위에 멋지게 등장하여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특히나 팬덤에서 그가 '1화의 악마'라는 별명을 얻는 데에는 파이어 펀치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애초부터 흡입력 있는 단편을 잘 그리는 만큼, 임팩트 있는 한 화를 그려내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저런 별명이 붙은 것입니다. 저 별명은 후지모토 타츠키라는 만화가의 어깨 위에 얹히는 엄청난 기대의 증명이기도 하고, 또 그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으로도 이어집니다. 1화가 수준이 너무나도 높은 나머지, 장편 연재에 따라 작품이 진행되며 점점 그 기세가 꺾인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산으로 가는 전개, 묘하게 힘이 빠진 작화 등을 그 근거로 삼습니다.
저는 파이어 펀치의 팬이자 후지모토 타츠키의 팬인 만큼 '1화의 악마'라는 별명의 긍정적인 측면에 더 주목합니다. 그 1화라는 것은 작품의 세계관과 방향성, 세일즈 포인트와 작가의 색깔을 모두 함축해서 커다란 한 방을 남겨야 하는 무대입니다. 그 1화의 디자인에 있어 천부적인 소질을 보이는 후지모토 타츠키는, 링 위에 오른 직후만큼은 무적자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폭발력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시들해지는 건 역시 아쉽습니다. 히트작 '체인소 맨'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파이어 펀치의 경우 유독 그 정도가 심했기에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특히 파이어 펀치는 만화 그 자체보다도 조롱성 '밈'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의 뒷심 부족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술한 '추격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인터뷰를 토대로 생각해 보면 또 다른 생각이 듭니다. '예상치 못한 전개로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함의 연속이다'라거나,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기 어렵지만, 끝까지 보면 이거다 싶은 느낌이 있다'라는 이야기에 파이어 펀치는 완벽히 부합합니다. 뿐만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어떻게 될까'를 넘어 좀 더 깊은 사고로의 다리를 놓아 주기까지 합니다. 즉 파이어 펀치는 본인이 가진 작품 철학을 그대로, 잘 녹여낸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작품 속에서 지독하게 나오는 예상치 못한 전개, 소위 '꺾기'마저 작품관 표현의 영역이었다면 파이어 펀치는 적어도 본인에게 있어서만큼은 만족스런 작품일 것입니다. 대중의 부정적 평가와는 무관하게 말입니다. 슈퍼 루키였던 후지모토 타츠키가 링 위에서 한껏 뽐낸 장기를 지금부터 같이 알아봅시다.
파이어 펀치가 연재 초반 그렇게나 떠들썩했던 이유는 파격적인 전개와 더불어 작화의 공이 큽니다. 극화풍과 만화풍의 사이에서 균형 잡힌 작화로 서브컬처 매니아부터 매니아가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폭넓게 어필할 수 있었습니다. 이 탄탄한 작화를 바탕으로 한 센스 좋은 연출도 파이어 펀치의 매력입니다. 좌측 사진에서 그런 부분이 잘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이 수려한 작화와 연출은 파이어 펀치의 조금 독특한 전개 방식에도 독자들을 유지하는 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에 더 가깝겠지만, 작가 본인이 추구하던 '도대체 어떻게 될까' 하는 만화라는 것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이 작화 구성에는 지금 들으면 입이 떡 벌어지는 어시스턴트들이 함께했습니다. 현재는 모두 데뷔하여 본인의 이름을 내건 히트 작품을 멋지게 연재하고 있습니다. '지옥락'의 카쿠 유지, '스파이 패밀리'의 엔도 타츠야, 마지막으로 최근 넷플릭스에서 인기를 끄는 '단다단'의 타츠 유키노부입니다. 이 훌륭한 재능의 작가들과 후지모토 타츠키가 공들여 그려낸 것이 파이어 펀치의 세계입니다. 그 덕에 배경을 비롯해서 눈보라가 휘날리는 효과, 태양빛, 해수면과 물방울 등 자잘한 부분까지 훌륭한 작화를 보일 수 있었습니다. 특히 후지모토 타츠키 본인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영화적 연출(카메라 워크 및 다양한 구도)을 위해서는 그림에 적잖은 수고가 들어갈 텐데, 이 어시스턴트들의 노고가 상당히 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카쿠 유지와 엔도 타츠야는 파이어 펀치를 함께한 뒤 본인들의 개인 작품을 연재하기 시작했으며, 타츠 유키노부는 체인소 맨 1부 연재까지 동행했습니다. 단순히 네임밸류만 놓고 보더라도 상당한 무게감을 갖는 파이어 펀치입니다.
이 작화의 최고봉은 초반부 기차 액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롭게 등장한 핵심 인물인 토가타가 납치된 주인공을 구하기 위해 기차를 습격하는 장면입니다. 종잡을 수 없는 전개, 토가타라는 매력적인 등장인물, 그의 목적인 '영화 촬영'을 바탕으로 흘러가는 연출 구성 등 즐길거리가 가득합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화룡점정을 찍는 것이 훌륭한 작화와 표현력입니다. 자칫 중구난방일 수 있는 만화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건 결국 상술한 모든 요소를 표현하는 그림의 역할입니다. 재능 넘치는 어시트턴트와 함께한 파이어 펀치의 서막은 작화만으로도 독자의 넋을 빼 놓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반부 작화는 늘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제게 있어서는 그림만 놓고 보는 만화가 아니었으니 상관이 없었습니다만, 객관적으로 봐도 초반부 작화와 후반부 작화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출판 만화 대부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종막으로 향하는 동안 워낙 전개를 많이 비틀어대는 탓에 지친 독자의 눈에는 작화 또한 불만 사항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결국 소위 말해 '산으로 가는 스토리'와 어시트턴트가 나가기라도 한 것인지 조금씩 아쉬워지는 작화가 결합되어 후지모토 타츠키 특유의 뒷심 부족으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점을 차치하고 거시적으로 봤을 때, 파이어 펀치의 그림은 훌륭하며 그 자체로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했던 파급력만큼이나 많은 밈을 낳은 파이어 펀치입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위 세 개를 들 수 있습니다.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대사도 저 장면들의 유명세에 큰 기여를 했지만, 역시 사람들의 인상에 남는 건 시각입니다. 강렬한 시각적 자극을 바탕으로 뇌리에 깊게 남았으니 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파이어 펀치가 되어달라며 주먹을 내미는 장면의 음영과 미묘한 표정, 정말이지 밈이 되기에 적합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의 팬 입장에서는 웃음거리로 소비되는 것이 썩 달갑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더 슬픈 건 잊혀지는 것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꽃을 몸에 두른 주인공처럼, 파이어 펀치는 밈이 됨으로서 영원한 불꽃과도 같은 생명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후로는 파이어 펀치의 스토리와 그 메시지에 대해 리뷰하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딱 적당한 분량이거나 조금 더 많은 양의 작품 외적인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약간씩 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파이어 펀치는 아주 강렬한 대비를 통해 작품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한편,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온기와 반대되는 개념인 추위, 눈보라와 반대되는 재해인 화재를 통해 펼친 1화의 대비는 작품 전체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파이어 펀치의 겨울이 끝나지 않는 지구입니다. 추위는 날로 거세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떨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작중 시점 지구 최대의 종교 국가 '베헴도르그'에 들어가지 못한 시민들은 열악한 촌락에서 내일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세상입니다. 주인공, 아그니는 여동생인 루나와 함께 노인들이 많은 마을에서 살고 있습니다. 얼어붙은 세상 속에서 태어나는 인구는 적으니 고령화 사회는 필연적입니다.
파이어 펀치의 세상에는 '축복'이라는 초능력이 존재합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끝나지 않는 이 겨울도 어느 축복자의 능력 때문이라고 합니다. '얼음의 마녀'라고 하는 축복자가 지구를 얼어붙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아그니와 루나 또한 축복자입니다. 남매가 모두 재생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아그니 쪽은 재생 능력이 강해서, 팔이 잘리더라도 금방 다시 자라나는 정도의 회복력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루나는 아그니에 비해 회복력이 약해, 아그니는 언제나 루나를 지켜 주고자 합니다.
세상이 얼어붙으며 먹을 것도 당연히 줄어들었습니다. 작물을 재배하는 것도, 짐승을 사냥하는 것도 점점 어려워집니다. 자신들을 거둬 준 노인들의 마을을 아사로부터 지키기 위해, 아그니는 무서운 결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팔을 잘라서 고기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라도 다시 재생될 만큼 강한 회복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 고통만 감수한다면 모두를 먹일 수 있는 식량이 나오는 셈입니다. 물론 노인들 중에는 인육을 먹는 것을 거부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 남매를 거둬 준 사제는 그 모든 고통을 받아들이더라도 죽음만은 저항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은 아그니의 고기를 먹으며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은 순식간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베헴도르그의 군대가 물자 보급을 이유로 마을에 들렀으나, 그들이 본 건 인육이었습니다. 아그니의 재생 능력과 마을의 열악한 환경을 이해하지 못한 베헴도르그의 병사들은 '인육을 먹는 식인자들의 마을'이라며 분노합니다. 그로 인해 무리의 대장이었던 도마라는 남자가 마을과 아그니에게 저주를 내립니다. 그의 축복을 통해서입니다.
도마는 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축복자입니다. 그리고 그의 불꽃은 붙은 대상을 전소(全燒)하기 전까지 꺼지지 않습니다. 도마의 불은 마을 전체를 태웠습니다. 건물부터 사람까지 남김없이, 모조리 불탄 마을 속에서 아그니 또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너무 강한 재생 능력 탓에 죽지 못하고 계속 불타는 아그니는 끝내 재생 능력을 고의로 억눌러 죽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부모님 곁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던 아그니의 주먹에 익숙한 감각이 느껴집니다. 여동생인 루나와 자주 주고받던 사인입니다. 불타는 몸으로 아그니에게 기어 온 루나는 주먹을 맞대는 남매 간 약속의 표시를 전하며, '살아요'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아그니는 삶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보다 재생 능력이 약해, 저 말을 마지막으로 불타 죽은 루나의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가겠노라 다짐합니다. 고통스럽게 살을 태우는 불길과 함께 복수심을 태웠고, 끝내 불길에 적응해 몸을 일으키게 됩니다. 가까스로 오른쪽 얼굴의 불길을 치워내 시야를 확보한 아그니는 걸음을 내딛습니다. 원수 도마가 있는 베헴도르그로 향하는 여정입니다. 지옥 문턱에서 돌아온 복수자, 파이어 펀치의 시작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얼어붙은 상황에서 전신이 불타는 남자는 눈에 띌 수밖에 없습니다. 파이어 펀치는 아주 원초적이고 직관적인 대비를 통해 인상적인 주인공을 만들었습니다. 한편 아그니는 자신을 보살펴 준 사제의 가르침을 누구보다 충실히 따르게 됐습니다. 세상 모든 고통 중 가장 괴롭다는 작열통을 견디면서도 죽음만은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합니다. 최악의 빙하기, 몰살된 가족과 이웃, 그리고 끊임없이 몸을 태우는 불길이라는 상황마저 견뎌내며 살아가는 아그니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가야 한다는 인간사의 진리를 아주 명료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프랑스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가 쓴 '시지프 신화'를 여는 문장입니다. 신들에게 범한 죄로 산 정상까지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 올리는 시지프를 통해, 카뮈는 부조리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야 할 이유에 대한 물음을 던집니다. 시지프는 산 정상까지 바위를 굴리더라도, 뾰족한 산의 형태로 인해 곧바로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맙니다. 다시 바닥에서부터 정상까지 바위를 굴려야 하는 것입니다. 시지프가 겪고 있는 부조리는 '벗어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이라는 가장 직관적인 형태로 표현됩니다. 파이어 펀치의 주인공인 아그니 또한 벗어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에 처해 있습니다. 하지만 시지프와 아그니 모두 살아가야 합니다.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시지프 신화와 파이어 펀치는 비슷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지만, 만화 시작 시점의 아그니와 시지프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아그니는 복수라는 목표를 위해 부조리를 견디고, 자살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아그니의 진심은 만화가 진행됨에 따라 다방면으로 변하게 됩니다. 아그니도 시지프 신화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이 점을 염두하며 만화를 보는 것도 좋은 감상 자세일 것 같습니다. 물론 저 물음에 대한 대답은 본 리뷰 안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파이어 펀치는, 기아와 피로 얼룩진 빙하기 속 프로메테우스가 된 아그니를 통해 삶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만화입니다. 후지모토 타츠키의 차기작인 체인소 맨 또한 전하고 싶은 바가 존재한다는 건 인지할 수 있지만, 그런 점보다도 액션과 다크 판타지적 요소, 서브컬처 요소가 강조됩니다. 하지만 파이어 펀치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전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게, 또 자주 드러납니다. 이런 성격의 창작물을 좋아하지 않는 분이라면 부담스럽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입니다. 후지모토 타츠키는 이 메시지들을 전달하기 위해 작품을 마구마구 비틀고 꺾습니다. 파이어 펀치는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시리즈로 익숙한 일본 문학의 전개 방식인 서-파-급 구조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 단계의 진행 정도에 따라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주요 요소 또한 휙휙 바뀝니다. 이제부터는 그 방식에 대해 알아봅시다.
파이어 펀치는 안티 플롯으로 점철된 만화입니다. 안티 플롯이란, 전형적인 플롯에 대한 구조적 반전을 말합니다. 이 반항의 과정을 통해 기존의 논리에 도전하고 조소를 보내는 것입니다. 이야기 구성의 원칙이라 할 수 있는 아크플롯을 뒤집는 파격적 연출로 깊게 각인되는 것을 노리며, 그 과정에서 메시지 또한 더 잘 전달된다면 성공적인 안티 플롯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념 따위를 노골적으로 보여야만 안티 플롯인 건 아닙니다. '고도를 기다리며' 등으로 대표되는 부조리극 또한 훌륭한 그 안티 플롯의 예시입니다. 하지만 상술했다시피 파이어 펀치는 전하고자 하는 바가 명료하며 작품 내에서 몇 번이고 강조됩니다. 핸들이 고장난 자동차처럼 예상할 수 없는 길을 달리면서 말입니다.
강력한 임팩트의 1화로 다크한 복수극을 기대한 팬들에게, 파이어 펀치는 초장부터 카운터를 날렸습니다. 불타는 주먹을 내지르는 것 말고는 달리 요령이 없던 아그니는 목이 잘려 바다에 버려질 위기에 놓입니다. 그런 아그니를 구출하는 것은 영화광 토가타입니다.
아그니와 같은 재생 능력자라 30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여성인 토가타는, 구세계의 유산인 영화 시청이 유일한 삶의 이유입니다. 하지만 베헴도르그가 그녀의 집을 불태우며 모든 영화가 소실되고 맙니다. 삶의 이유를 잃은 토가타에게 불타는 남자인 아그니의 존재는 희망이었습니다. 아그니를 대상으로 하는 영화를 직접 찍으면 되겠다고 생각해서입니다. 300년이라는 세월 간 누적된 초인적 신체능력을 바탕으로 목만 남은 아그니를 구해내며 두 사람의 만남은 시작됩니다.
토가타와 만난 아그니는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우선 베헴도르그에 도달한 아그니는 도마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망가져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태워 죽인 자신의 죄에 대해 속죄하며 떠는 유약한 남자가 되고 만 도마를 보며, 아그니는 복수의 의미를 의심합니다. 한편 베헴도르그에는 자신의 여동생 루나와 똑같이 생긴, 유다라는 이름의 여자가 있었습니다. 사실 구사일생하여 성장한 루나가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에 찬 아그니에게 복수라는 불꽃은 점점 시들해져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아그니의 등을 떠미는 건 토가타입니다. 유다가 아그니에게 그랬던 것과 똑같이 유다의 목을 잘라내 바다에 버리려고 하는 토가타를 아그니는 극구 말립니다. '얼굴이 똑같으니 정말 내 여동생일 수도 있다'는 이유입니다. 아그니, 그리고 토가타와 같이 재생 능력자인 유다를 바다에 버리지 않는 조건으로 아그니는 토가타의 제안을 수락합니다. 그녀가 찍는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15화 무렵에 일어난 일입니다. 아그니를 살게 하는 복수의 일념은 흔들리고 있고, 그 바탕에는 죽은 줄 알았던 여동생이 살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습니다. 이제껏 복수극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복수의 이유와 원동력이 전부 꺾이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작품은 새로운 주제를 꺼내 옵니다. 바로 영화입니다. 이제부터 아그니는 감독 토가타의 지시 하에,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베헴도르그에게 복수하는 주인공을 연기하게 됩니다. 작품의 분위기와 전개는 종잡을 수 없는 드리프트를 일삼습니다만, 이 영화와 연기라는 주제 또한 파이어 펀치를 관통하는 논제가 됩니다. 이것이 위의 서파급 구조와 맞물리며, 영화 촬영을 시작하게 되는 시점부터가가 파(破)에 해당하는 부분이 됩니다. 본래 서파급 구조에서 파는 이야기의 중요한 갈등이 시작되며 엔트로피를 통해 기존의 상태를 깨뜨리는(破) 단계입니다.
오타쿠 친화적으로 설명하자면, 안노 히데아키는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파에서 마리의 등장과 아스카의 운명이 뒤바뀌는 등 거대한 엔트로피를 파(破)로 규정하였습니다. 후지모토 타츠키가 에반게리온을 좋아한다는 점으로 추측해 보건대 이것은 안노의 것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새로운 주요 갈등을 통해 이야기의 분위기를 급변시키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예측할 수 없는' 만화를 그리고 싶었던 후지모토 타츠키에게 있어서 이 영화 촬영의 시작은 만화의 핵심이나 다름없었을 것입니다.
토가타의 지시 아래 복수자를 연기하여 베헴도르그에 도달하는 아그니는, 노예로 잡혀 갇혀 있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의 진심과 마주합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복수자의 연기를 해야 하는 아그니에게 있어 노예 구출은 무의미하며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일을 번거롭게 만들 뿐입니다. 그럼에도 아그니는 철창을 구부려 노예들을 탈출시킵니다. 무슨 짓이냐는 토가타의 질책에 아그니는 '구하고 싶었으니까'라고 답합니다. 아그니의 진심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마을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팔이 잘리는 고통을 견딘 것도, 죽은 동생이 돌아오지도 않음에도 복수하겠다는 연기의 자세로 여기까지 온 것도, 몸이 불타면서 살아 있는 것도 모두 이 세상에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조리에 패배해 삶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던 아그니는, 철창 속 노예들을 구하는 것으로 눈앞의 부조리에 저항합니다. 여동생의 복수를 하겠다는 것도 연기나 다름없었고, 유다의 목숨을 담보로 잡아 촬영되는 영화 속에서도 복수자를 연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순간 속 아그니는 자신에게 솔직한 삶을 살아갑니다. 세상에 지고 싶지 않아 불타는 몸으로도 살아가는 아그니. 타고 있기 때문에 무기를 쥘 수도 없어 공격 수단은 주먹질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주먹질이야말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인간이라도 해낼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저항입니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 최약의 수단으로만 저항하는 아그니의 '파이어 펀치'는 그의 세상에 멋진 한 방을 날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파이어 펀치의 상징성과 대비, 그 강렬한 전달 효과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아그니에게 구원받은 노예들이 아그니를 영웅이나 신으로 칭송하지 않아도, 삶 그 자체의 의미를 찾아나가고 있는 아그니에게는 찬사가 마땅합니다.
하지만 작품은 또 예상치 못한 흐름으로 나아갑니다. 노예를 해방하고 베헴도르그를 함락시켜버린 아그니지만 그에게는 또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헴도르그는 거짓 신앙 위에 세워진 허상과도 같은 국가였으며, 유다 또한 자신의 여동생이 아니었습니다. 아그니에게 남은 건 그가 구한 노예들과 지지자였습니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아그니는 신을 연기하게 됩니다. 그의 추종자들이 아그니를 신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약자들을 먹이기 위해 불타지 않는 오른쪽 얼굴을 몇 번이고 재생시켜 잘라내는 신세에 놓입니다. 악의 축을 무찔렀음에도 해피 엔딩과는 거리가 멉니다. 파이어 펀치의 안티플롯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그니에게 베헴도르그 붕괴 때 죽었다고 생각한 도마가 실은 살아 있다는 정보가 들려옵니다. 복수의 결판을 내기 위해 도마에게로 향하지만, 도마는 죄책감에서 회복한 뒤였습니다. 그는 베헴도르그의 진실을 알려줍니다. 구세계의 쓰레기 영화 '파이어 베헴도르그'라는 제목에서 국가의 이름을 따 오고, 불길로 악당과 싸우는 쓰레기 영화의 주인공을 신으로 모시며 유지된 국가였다는 것입니다. 도마 자신도 그 세뇌에 가까운 신앙을 마음 깊이 믿은 탓에 악을 불태우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것이라며, 아그니를 향해 다시 한 번 사과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아그니에게 죽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도마는 갈 곳 없는 아이들을 거둬 기르는 동시에 그들의 선생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있으니 죽을 수 없다고 하는 도마의 의견에 아그니는 마음이 약해집니다. 자신을 신으로 믿고 모시는 약자들이 있고, 복수의 의미도 점점 희미해지는 상황. 아그니는 걸음을 돌리려 하지만...
아그니가 본 것은 여동생 루나의 환각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파이어 펀치가 되어 도마에게 복수해달라는 그 말에, 아그니는 남은 오른쪽 얼굴도 불길로 휘감습니다. 그 길로 도마에게 달려가 도마를 태워버린 뒤, 도마와 함께 살고 있던 아이들까지 모조리 죽입니다. 정신이 든 아그니는 자신이 벌인 일에 자책하며 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하려고 하지만, 이번에도 아그니의 자살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토가타였습니다. 도마에게 복수하는 걸 촬영하기 위해 따라왔던 토가타는 물 속으로 뛰어들어 아그니를 구해내고는 불타 죽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토가타가 아그니에게 남긴 유언은 '살아줘'였습니다. 아그니는 자신의 여동생 때와 똑같이 소중한 사람을 잃고 '살아갈 것'을 종용받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아그니는 대체 무엇이며 아그니를 둘러싼 삶은 무엇이길래 자꾸만 아그니를 붙들어 놓는 걸까요? 죽지 못한 아그니는 지옥 속에 남겨져 계속 신을 연기해야 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작품 중후반에 들어 정말로 등장하고야 만 '얼음의 마녀'가 실행하는 계획으로 인해 아그니교의 신도들은 모조리 거대한 나무에게 생명을 빨아먹힙니다. 마녀의 계획은 이 별의 생명을 나무에 집약해 세상을 데우는 것이었습니다. '스타워즈'의 신작을 볼 수 있을 때까지 별을 따뜻하게 유지해 새로운 문명이 자라나는 걸 기다리겠다는 정신 나간 이유는 차치하고, 그 나무의 핵은 유다였습니다. 첨언하자면 이 세상이 얼어붙은 이유는 얼음 마녀의 소행이 아니라 그저 별의 수명이 끝나가 빙하기가 온 것이었습니다. 그간 얼음 마녀와의 결전을 고대하던 독자들의 혼을 또 한번 흔들어 놓는 파이어 펀치입니다.
이런 충격적인 전개의 연속에서 아그니는 몇 번이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원하지도 않는 삶을 살며, 끊임없이 고통 속에 놓입니다. 그 속에서 삶을 포기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것이 아그니의 핵심입니다. 아그니의 주변 인물, 즉 아그니를 둘러싼 세상은 모두 아그니가 살아가길 원했습니다. 루나, 토가타, 선, 네네토, 그리고 아그니교의 신자들까지 아그니가 살아가는 것을 원합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이 삶을 이어가는 것이며, 너무나 좋아하는 배우가 계속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고, 동경하는 대상이 기적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 또한 그렇습니다. 단지 불타고 있지 않을 뿐, 우리를 사랑하는 누군가나 우리를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있어 우리는 아그니처럼 '계속 살아갔으면 하는 존재'일 것입니다. 어쩌면 인생은 영화처럼 원하지도 않는 자신을 연기하는 것일 수도 있고, 전부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울 수도 있습니다. 또 그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전신이 불타는 것처럼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중 초반 사제가 말했던 것처럼 죽음에만은 저항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이 지닌 미덕이며, 링 위의 강적인 세상에 맞서 묵직한 카운터 펀치를 날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토록 열렬히 세상과 맞서 싸운 아그니의 결말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의 종착역을 알게 됩니다.
세상이 다시 한번 빙하기를 겪고 아그니 또한 많은 일을 겪습니다. 기억을 잃은 유다를 여동생 루나인 것처럼 대하며 살아가다 다시 복수자 파이어 펀치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을 신뢰하던 사람들을 저버리기도 하고, 자신의 광신도가 된 선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자의인지 타의인지도 모를 것에 끌려다닌 아그니는 마침내 유다의 도움으로 몸에서 불길을 걷어내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모든 기억을 잃고, 선의 이름을 빌려 네네토의 남동생으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유다가 아그니를 위해 다시 한 번 나무가 되어 계속 데워 주고 있는 세상 속에서요. 하지만 영원한 세월을 사는 재생 능력자인 아그니는 네네토가 할머니가 되어 눈을 감을 때까지 여전히 젊은 모습 그대로입니다. 네네토가 세상을 떠난 뒤, 아그니는 한 영화를 접하게 됩니다.
그것은 전신이 불타는 남자가 세상에 맞서 싸우는 내용의 영화였습니다. 먼 옛날 토가타가 감독하고 네네토가 촬영을 담당한 그 필름입니다. 아그니는 이 영화를 보며 왠지 모를 벅차오름을 느낍니다. 주먹을 꽉 쥐게 하는 그 감정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어떤 순간에는 자신의 의지로, 또 어떤 순간에는 타인의 의지로 격렬했던 세상과 맞서 싸운 한 남자의 일대기는 그에게 있어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여기서 아까 이야기했던 시지프 신화의 이야기를 다시 끌고 오려 합니다. 시지프 신화의 마지막 문장은 정말 유명합니다.
산정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된다.
카뮈는 죽지도 못하고 끊임없이 바위를 산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시지프의 형벌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 속에 그려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카뮈가 시지프 신화를 통해 제시한 것은 삶의 부조리에 맞서는 두 가지 방법이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상술했듯 자살이며, 나머지 하나는 살아가는 이유를 다른 요인이 아니라 삶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살할 수 없다면 그 어떤 고통스러운 삶이어도 살아가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그 삶 속 시지프나 다름없는 우리가 행복하기를 상상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그니는 과연 영화 속 불타는 남자가 행복할 것이라 마음에 그려 볼 수 있었을까요? 아그니는 삶의 이유를 끊임없이 타인에게서 받아 왔지만 그 기저에는 살아가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이성 아래 억눌려 있었던 것이든, 기억을 잃어서 그랬던 것이든, 아그니의 삶은 역시 살아가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레서, 얼어붙은 세상이라는 산등성이에서 생존이라는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 올린 아그니에게는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그 가혹한 노동에 과연 결실이란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것을 파이어 펀치의 결말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나무가 된 유다가 별을 데워 주는 것도 결국 한계가 있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러 행성은 조각이 났고 그러는 와중에도 아그니는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주로 흘러 나온 아그니는 나무 속의 유다(자신을 루나라고 지칭하지만)와 만나게 되고, 둘은 서로를 '선'과 '루나'로 소개하며 애틋한 해후 속에서 눈을 감습니다. 그것과 동시에 유다 또한 길었던 삶에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이 기묘한 결말로 인해 파이어 펀치는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후에 나오는 장면이라고는 영화관을 떠나는 소년 소녀 시절의 아그니와 루나의 장면이 전부입니다.
언젠가 작품 속에서 토가타는 '사람이 죽으면 영화관에 간다'고 했습니다. 원하는 영화의 티켓을 고르고, 팝콘을 사서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서 계속 원없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의 온전한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결말은 무엇이며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요? 만화를 조금 되감아서, 몇 가지 장면을 함께 봅시다.
제가 갖고 있는 만화책을 직접 찍은 것이라 사진이 썩 좋진 않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으실 겁니다. 사제는 아그니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는 타인에게 평가를 받아야 비로소 아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그니는, 언젠가는 루나에게 더없이 좋은 오라버니였으며 언젠가는 장작이었습니다. 언젠가는 토가타의 영화 속 주인공 파이어맨이었으며 또 언젠가는 아그니교의 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수한 사람을 죽이며 세상을 배반한 살인귀 파이어 펀치이기도 했습니다. 살아가는 것에 있어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불가피한 이상, 그 삶 속에서 '나'를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은 결국 타인의 평가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이든, 원하지 않음에도 떠밀려 한 일이든,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연기를 한 일이든 말입니다.
이 장면 직후 토가타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영화 속 톰 크루즈가 너무 멋있어서, 당연히 현실의 톰 크루즈도 멋진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를 이상한 종교 단체로 꼬드기려 하는 등, 영화 속 멋들어진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죠. 하지만 영화 속 톰 크루즈에 익숙한 토가타로서는 결국 톰 크루즈는 영화 속에서 나온 것처럼 멋진 녀석일 것이라 생각하고 만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개인이 가진 스키마로 타인을 평가하고 규정합니다. 평가를 내리는 그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지도 못한 모습으로 규정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수한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 그 자체의 본질입니다. 실제로 아그니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삶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스키마나 간섭은 물론 유효하지만, 그것보다도 중요한 진리를 파이어 펀치의 최후반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유다가 다시금 나무가 되기 직전, 아그니의 불을 걷어내 주며 한 말입니다. '되고 싶은 당신이 되어라', 이것이 파이어 펀치가 전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기억을 잃고 만 아그니의 보호자가 되어 달라는 부탁을 거부하는 네네토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할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당신을 연기하라. 그렇게 하면 할 수 있는 당신으로 변해갈 것이다'. 유다가 긴 세월을 살며, 많은 역할을 연기하며 안 것은 '사람은 되고 싶은 자신이 되고 만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너무나도 많은 요소가 뒤얽혀 있습니다. 얼어붙은 세상이나 몸을 계속 태우는 불처럼, 환경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또 유다가 단순히 죽은 여동생 루나와 닮았다는 이유로 집착하고, 선이 타오르는 신으로서의 아그니만을 기대하고 믿었던 것처럼 각자가 가진 스키마 또한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는 중대한 요소입니다. 그 삶 속에서 우리는 개인의 정체성을 의심하기도 하고, 때로는 영화의 배우같이 실제 자신과는 동떨어진 배역을 연기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살아가다 보면 '되고 싶은 우리 자신'에 다다르게 됩니다. 우리는 결국 시간이 흘러 언젠가 자신의 삶을 영화처럼 되돌아볼 때 만족스러운 한 편의 영화였다고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시지프가 행복하여야 한다고 상상할 수 있었던 것처럼요.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에 맞서는 것을 포기해서는, 세상에게 져서는 안 됩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세상 속에서 몸이 불타는 고통을 겪으면서, 가장 원초적인 저항인 펀치만으로 세상과 삶에 맞서 싸운 아그니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파이어 펀치의 줄거리와 함께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대충 다 읊었습니다. 워낙 이야기가 중구난방이고 핸들도 휙휙 꺾어 대는 탓에 독자의 시선에서 따라가기 버거운 걸 넘어 지치게 만드는 만화라고 해도 할 말 없을 정도입니다. 초반부를 통해 기대하게 만든 독자들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때린 것도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신인 작가가 자신이 가진 철학과 역량을 백 퍼센트 내보이기에는 최고의 작품 형태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파이어 펀치의 좋은 점은 역시 '영화처럼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겠습니다. 작가 자신이 영화에 미쳐 있는 만큼 매력적인 장면 구성과 작화를 통해 훌륭한 연출을 선보였습니다. 다른 출판 만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파이어 펀치만의 매력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또한 이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근거입니다. 다 보고 나면 엉망이지만 재미있는 수작 영화를 감상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파이어 펀치에 대한 의견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1화만 재밌었던 괴작에서부터 명작이라고 하는 사람들까지 정말 양 극단을 달립니다. 망작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은 아마 1화에서 느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파이어 펀치가 싫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품 후반부 선이 아그니더러 '내가 아는 파이어 펀치는 이런 괴물이 아니다'라고 분노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느끼기에 파이어 펀치는 역시 좋은 작품입니다. 작화, 연출, 담고 있는 메시지가 모두 제 맘에 쏙 든 것은 물론이고, '신인 만화가의 데뷔 작품'이면서 이만큼 독특한 매력을 가졌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고 싶습니다. 무명 작가임에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이만큼 파급력 있는 작품을 만들어낸 것, 그 작품 속에서 자신의 색채를 잃지 않고 '되고 싶은 자신'이 되어 그리고 싶은 만화를 그려냈다는 것, 그러는 와중에도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명확히 했다는 것 모두 대단한 일입니다.
물론 출판 만화는 상업 논리의 구조 하에 있으니 개인의 자아 실현 같은 것이 중요할 리도 없고 우선시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파이어 펀치 정도의 작품을 그려내며 자아 실현까지 해낸 후지모토 타츠키가 창작자로서 너무나도 부럽습니다! 괴상한 전개로 훅훅 꺾으며 본인은 얼마나 재밌었을까요? 츠루마키 카즈야의 작품을 리뷰하면서도 제작하며 얼마나 즐거웠을지 부럽다는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는데, 후지모토 타츠키가 츠루마키 카즈야의 팬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역시 그 나물에 그 밥이네요. 하지만 저도 창작을 한다면 이런 식으로 하고 싶습니다.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자신이 하고 싶은 말,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이는 것으로 '되고 싶은 나 자신'이 되고 싶습니다. 작품에서 나아가 실제 삶에서도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근거가 되어 줄 실력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압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날뛰는 괴짜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삶 속에서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을 멈추지 맙시다! '되고 싶은 나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그럴 수 있을 만큼 자신을 연마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좌우지간 후지모토 타츠키는 파이어 펀치를 통해 기대되는 작가 반열에 올랐으며 자신의 이름을 단단히 각인시켰으니 가히 그의 K.O 승이라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하고 싶은 걸 전부 다 하면서도 그만큼 이뤄낸 것이니까요. 더해서 차기작 체인소 맨은 오타쿠들의 감성을 완전히 저격하며 2020년대 만화의 게임 체인저가 되었습니다. 거기다 자신의 작품이 두 개나 영화화됐으니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할까요?(하지만 <룩백>에 대해서는 복잡한 감정입니다. 어느 블로거 분께서 작성하신 첨예한 비판 글을 보고 저 역시 인식을 조금 달리 하게 됐습니다.) 단순한 괴짜를 넘어 전 세계가 주목하는 만화가가 된 후지모토 타츠키, 그의 행보를 앞으로도 기대하고 응원합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하자면 이 리뷰는 2월에 작성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다섯 달이나 밀리고 말았네요. 그 다섯 달 동안 저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처음 하는 사회 경험 속에서 나름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일이 아니더라도 요상한 일들, 제대로 하지 못 한 일들, 실수한 일들이 너무 많았고요. 다른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별거 아닌 일일 수도 있겠지만 저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벅찼습니다. 저는 여러모로 남들에 비해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젠 이런 말을 스스로 하면서도 주눅들지 않을 만큼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실수는 많을 거고 좌절하는 일도 많이 있겠지만 세상에 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파이어 펀치를 리뷰하며 다시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링 위에서 삶과 끊임없이 펀치를 주고받다 보면 '되고 싶은 나'라는 챔피언 벨트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우선 이 리뷰를 어찌저찌 잘 끝낸 것부터가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후련하고 만족스럽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서도 인생이라는 링 위에서 고단한 싸움을 이어 가고 계실 테죠. 부디 지지 말고 용감히 맞섭시다! 저는 제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세컨드가 되어 그들의 삶을 응원할 생각입니다. 이 글을 읽어 주시고 저와 마음이 통한 분들께도 그 응원의 힘을 전달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은 너무나도 덥지만 또 반드시 올 겨울을 잘 이겨냅시다. 늘 행복하세요! (v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