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그린 미래>- 데빌 서머너 소울 해커즈

by 번뇌즉보리

메타버스의 시대에서 20세기를 향한 역주행



로블록스(좌), 도깨비(우)


지금에서야 그 열기가 시들해졌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크게 대두되었던 주제는 메타버스입니다. IT 산업이나 컴퓨팅 등에 별 관심이 없으신 분들께서도 매스컴이나 정부 사업 에서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것 같습니다. 메타버스는 쉽게 말하자면 가상현실을 다루는 것을 총칭하는 용어입니다. 게이머들이나 인터넷 유저들에게 가상현실이란 이미 익숙한 요소였습니다. 모니터 속 인터넷 세상에서 또다른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당시 르네상스를 맞았던 RPG 게임의 본질이었으니까요. 한국에서는 특히나 마비노기 등이 판타지 라이프를 표방하며 이 분야의 터줏대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대가 흐르며 기술의 발달과 함께 '메타버스'라는 용어로 각종 매체에서 새롭게 정의되며 가상현실은 본격적으로 미래 생활과 기술의 지향점이 되었습니다. 게이머들에게 너무나도 당연했던 주제가 새로운 시대의 핵심으로 급부상하며 남녀노소의 관심을 가득 받다니, 벌써 17년차 게이머인 저 역시 얼떨떨했습니다. 하지만 Meta를 필두로 현실과 가상 공간을 넘나드는 콘텐츠 사업의 규모는 어마어마하게 커졌습니다. 그 바탕에는 역시 무서운 속도로 발달한 네트워킹과 어플리케이션 기술이 있습니다. 한때 제페토 등의 어플리케이션으로 누구나 가상 공간 속 자신을 창조해내고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 유행하던 시기가 떠오르네요. <마인크래프트>나 신흥 강자 <로블록스>가 언론에도 보도되며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습니다. <검은사막>으로 유명한 게임 제작사 펄어비스는 신작 <도깨비>를 공개하며 메타버스의 유행에 올라타 그것을 이끌고자 했던 것도 기억납니다.(지금은 출시 기약 없는 게임이 됐지만요) 사람들의 관심은 한풀 꺾였으나 메타버스는 여전히 미래 콘텐츠의 핵심이며 많은 기업들이 매진하고 있을 것입니다. 2025년을 살아가는 저는 여전히 우리의 미래를 논할 때 메타버스와 AI를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리뷰하는 <데빌 서머너 소울 해커즈>는 메타버스를 비롯한 미래 기술들과 사회를 그려낸 게임입니다. 중요한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이 게임이 1997년 작품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단순히 메타버스와 테크놀로지를 묘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로 야기되는 사회 형태를 담아내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여가 시간에 온라인 게임 따위에 접속하여 '가상현실 속 또다른 나'로 살아가는 것이 별다른 인지조차 필요하지 않을 만큼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1997년에는 달랐습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온라인 게임 등은 대부분 존재조차 하지 않던 시절이며, MMORPG와 온라인 게임이라는 개념을 보편적으로 정립한 <울티마 온라인>이 1997년 9월에야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시간대적으로 따지자면 소울 해커즈가 울티마 온라인보다 늦긴 했습니다만, 개발 기간만 고려하더라도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이야기입니다. 데빌 서머너 소울 해커즈(이하 소울 해커즈)는 이처럼 독특한 배경 설정과 매력적인 시나리오 라인, 훌륭한 게임성으로 여신전생 시리즈 팬들에게 많은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는 팬뿐만 아니라 ATLUS 내부에서도 그러한 모양인지 소울 해커즈는 두 차례나 이식 발매되었으며 이후 ATLUS의 게임들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나중에 자세히 다룰 것이지만 간단하게나마 짚고 넘어가자면 향후 <페르소나> 시리즈의 바탕이 되었으며, 아예 <소울 해커즈 2>라는 후속작이 발매되기도 했습니다.



파이널 판타지 7과 소울 해커즈. 믿기 힘들겠지만 당시에는 저 전설적인 게임에 비견될 정도였다.


또한 소울 해커즈는 여신전생 시리즈 10주년을 기념하여 대대적으로 준비된 작품입니다. 기존 ATLUS 작품들에서 혁신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여러 시도를 했다는 것을 본 리뷰를 통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ATLUS의 노력에 걸맞게 1997년 당시에는 기대와 호평을 받은 RPG였으며, 그 파이널 판타지 7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했으니 이 게임의 퀄리티와 파급력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1인칭으로 던전을 탐험하는 형태의 여신전생은 소울 해커즈 이후 한동안 발매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도 소울 해커즈에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디렉터인 오카다 코지가 인터뷰에서 직접 '소울 해커즈가 여신전생 시리즈의 집대성이 되었다'고 하는 만큼, ATLUS의 개발진들이 가진 역량을 백 퍼센트 발휘하여 만든 명작 어반 판타지 JRPG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페르소나 3(좌), 소울 해커즈 2(우)

그렇다면 소울 해커즈는 도대체 어떤 매력을 갖고 있으며 어떤 점에서 특별했던 것일까요? 그것에 대해서 제가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우선은 ATLUS와 <여신전생> 시리즈 이야기, 그리고 <데빌 서머너> 시리즈 이야기를 간단하게라도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여신전생에 드라마를 더하다, 데빌 서머너 시리즈


디지털 데빌 스토리 여신전생(좌), 디지털 데빌 스토리 여신전생 2(우)


1987년, ATLUS는 역사적인 발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일본의 소설가 니시타니 아야의 소설 <디지털 데빌 스토리>의 1권 <여신전생> 편을 바탕으로 하는 게임 제작 하청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위저드리 시리즈를 바탕으로 한 1인칭 던전 RPG로 개발된 <디지털 데빌 스토리 여신전생>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여신전생 시리즈의 신호탄이 되었으며, 당시 게임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신선한 요소들로 가득했습니다. 던전을 탐험하며 악마와 교섭하고, 그 악마들을 합체해 더욱 강한 악마를 불러내는 시리즈 전통의 시스템은 게이머들에게 충분한 자극이 되었습니다. 또한 '컴퓨터를 사용해 악마를 불러낸다'는 설정 자체도 매력적이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후속작 <디지털 데빌 스토리 여신전생 2>는 크게 흥행하여, 여신전생 시리즈가 갖는 고유한 매력으로 <드래곤 퀘스트>나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에 견줄 만한 게임으로 부상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 두 작품을 바탕으로 ATLUS는, 니시타니 아야의 원작 소설에서 탈각하여 자신들만의 여신전생을 만들게 됩니다. 그것이 <진 여신전생> 시리즈입니다.


진 여신전생(좌), 진 여신전생2(우)


이 진 여신전생 시리즈 또한 게이머들의 호평을 받으며 ATLUS가 RPG 제작사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는 데 크게 일조했습니다. 언젠가 이 작품들에 대해서도 다룰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며 특징을 간결히 짚자면, 디스토피아적인 시나리오와 세계관을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항상 게임의 무대가 되는 도쿄는 어떠한 이유로든지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습니다. 진 여신전생 시리즈는 이 도쿄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당시 만연한 세기말적 풍조에 편승하여 자신들만의 세계관 분위기를 구축하였습니다. 또한 게임 속 선택지를 통해 바뀌는 주인공의 성향과 그것에 따른 분기별 시나리오 루트와 멀티 엔딩 시스템도 진 여신전생에서 정립된 것입니다. 로우, 카오스, 뉴트럴로 구성된 세 가지 루트와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멀티 엔딩 시스템은 진 여신전생 시리즈가 세계관뿐만 아니라 시스템적으로도 게이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게끔 했습니다.


하지만 <진 여신전생 2> 이후 ATLUS는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2편의 마지막을 기독교의 유일신 야훼, 즉 YHVH를 쓰러뜨리는 것으로 마무리지었으니 더는 후속작을 만들 여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계관 또한 1편의 세계관을 2편에서 이어받아 완결을 냈으므로 더 나올 악마도, 더 써먹을 배경도 없었습니다. 특히 디지털 데빌 스토리 여신전생 2 또한 YHVH를 쓰러뜨리는 결말이며, 이것을 다시금 활용하여 진 여신전생 2의 결말을 지었으니 벌써 재탕을 해버린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대로 여신전생 시리즈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계속 게임을 개발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ATLUS의 선택은 외전 작품을 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진 여신전생> 시리즈의 세계와 정식 넘버링은 2에서 완결된 것으로 하고, 방향을 틀어 새로운 여신전생을 개발하고자 했습니다.


ATLUS는 우선 1994년에 진 여신전생 1편 속 주요 사건인, 도쿄에 ICBM이 떨어져 초토화가 되는 '대파괴'가 일어나지 않은 평행세계라는 설정의 <진 여신전생 if>를 발매했습니다. 좀비와 이교도들이 판치는 폐허 도쿄가 아니라 마계로 전이된 고등학교를 바탕으로 학생들끼리 힘을 합쳐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해당 작품을 통해 ATLUS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것인 즉 구태여 진 여신전생 넘버링을을 이어나가지 않고, 외전 작품들을 발매하여 여신전생 시리즈를 브랜딩하는 것이었습니다. ATLUS는 곧 출시될 두 콘솔 게임기로 각기 다른 시리즈를 전개하게 됩니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여신이문록 페르소나>를, 세가의 세가 새턴으로 <진 여신전생 데빌 서머너>를 출시했습니다.


여신이문록 페르소나(좌), 진 여신전생 데빌 서머너(우)


두 작품 모두 진 여신전생 시리즈 전통인 도쿄 파괴와는 연관이 없으며, 기존 작품들에서 각기 다른 요소들을 계승했습니다. 우선 페르소나는 직전 작품인 진 여신전생 if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주인공이 고등학생이며 친구들과 함께 사건을 헤쳐나간다는 점을 이어받고 더욱 강화하여 학원물의 성격을 띠게 됐습니다. 주요 시나리오가 두 개로 갈라지는 부분도 진 여신전생 if의 흔적이며, 진 여신전생 if의 가디언 시스템은 페르소나에서 주인공 일행이 소환하는 페르소나의 형태로 이어졌습니다. 현재까지도 주브나일 RPG를 지향하는 페르소나 시리즈를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발매한 이유는 아마도 플레이스테이션이 더욱 다양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새로운 팬층을 유입시키고 확보하기 위해 성인은 물론 학생들에게도 친숙한 고등학교 배경의 학원물 진 여신전생 if를 출시하게 된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반면 세가 새턴은 성인 중심의 코어 팬덤이 확실한 게임기였습니다. 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여신전생 시리즈로 기획된 것이 진 여신전생 데빌 서머너입니다. 진 여신전생이 아니라 여신이문록이라는 별칭을 달고 출시한 페르소나와 달리, 진 여신전생 이름을 그대로 달고 출시한 만큼 데빌 서머너는 기존 작품의 주요 요소인 COMP(악마 소환을 위한 휴대용 컴퓨터)가 여전히 등장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휴대용 컴퓨터를 통해 악마를 소환한다는 유비쿼터스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현대 사회에 암약하는 악마 소환사(데빌 서머너)들의 암투를 그려냈다는 것이 데빌 서머너의 특징입니다.


성인을 타겟으로 한 만큼 데빌 서머너에는 여러 변화가 있었습니다. 우선 시리즈 최초로 성인 주인공을 내세웠습니다. 주요 대상이 성인인 만큼 몰입을 위해서 당연한 선택입니다. 그러면서도 시리즈 기존 팬들이 좋아할 수 있는 오마주 요소들을 놓치지 않고,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악마 소환사들의 이야기를 드라마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드라마적 요소'라는 것이 데빌 서머너와 소울 해커즈의 주요 키워드 중 하나라고 꼽을 수 있습니다. 점진적으로 현실과 멀어져버리는 다크 판타지 게임이었던 기존 시리즈와는 달리 현실과의 가까운 거리감을 유지한 채 '디지털 기술과 악마'라는 여신전생의 매력을 잘 녹여낸 점이 그런 것입니다. 실제로 데빌 서머너 시리즈는 드라마화되기도 하였으니 ATLUS의 기획은 적절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외에도 직업 선택과 카네코 카즈마의 다양한 악마 디자인인, 방대한 악마 대화의 규모는 팬들에게 제대로 유효타를 날렸습니다. 덕분에 데빌 서머너는 훗날 60만 장의 판매량을 올린 <진 여신전생 4>가 갱신하기 이전까지 36만 장으로 '가장 많이 팔린 여신전생'이라는 왕좌에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소나도 시리즈화에 들어갔으니, 당시로서 전무후무한 흥행을 이뤘던 데빌 서머너를 시리즈화하지 않는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진 여신전생 데빌 서머너에서 드라마틱한 요소를 더욱 강화하는 동시에 새로운 개발진들을 바탕으로 기존 작품보다 한층 다른 분위기를 내고자 한 후속작이 바로 <데빌 서머너 소울 해커즈> 되시겠습니다. 이름에서 진 여신전생이 빠진 것으로 데빌 서머너 시리즈에 거는 기대가 컸으며, 독자적인 세계관과 시리즈를 구축하고자 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울 해커즈의 개발 배경에 대해 간략히 알아봤습니다. 적고 나니 여신전생 시리즈의 역사처럼 되었습니다만, 소울 해커즈를 이해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이니 너그럽게 용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제 소울 해커즈의 특징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소울 해커즈만의 매력이란




우선 소울 해커즈의 시놉시스에 대해 살펴봅시다. 데빌 서머너 소울 해커즈의 배경은 근미래의 일본 속 가상의 기획도시 아마미(天海) 시입니다. 네트워크 기술을 비롯한 각종 최첨단 테크놀로지들의 시범 도입을 시행하고 있는 휘황찬란한 미래 도시 속 해커 그룹 '스푸키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공을 포함한 주요 등장인물들은 모두 스푸키즈 소속 해커입니다. 주인공과 그 소꿉친구 토오노 히토미가 아마미 시의 주민들에게 추첨을 통해 액세스 코드를 선행 배포한, 시에서 추진하는 가상현실 도시 '패러다임 X'의 액세스 코드를 해킹하여 탈취하는 장면으로 게임이 시작됩니다. 단순히 아마미 시에서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가상현실 도시에 대한 호기심으로 벌인 일이었으나 주인공과 히토미는 이를 기점으로 사건에 휘말리기 시작합니다. 패러다임 X를 즐기기 위해 아지트로 향한 두 사람에게 스푸키즈의 리더(핸들 네임 스푸키)는 우연히 입수했다며 GUMP를 내보입니다. 총 형태의 COMP인 GUMP에는 비밀번호가 걸려 있어 손을 댈 수 없었으니, 우선 원래 목적인 패러다임 X 속 세상을 탐험하는 주인공에게 '레드맨'이라는 수수께끼의 인물이 접촉해 옵니다.


동물의 형태를 하고 있는 레드맨(좌), 우라베(우)


레드맨은 '비전 퀘스트'라는 이름으로 주인공에게 타인의 삶을 체험시키는데, 주인공이 레드맨을 통해 본 것은 이 사회의 암부와 싸우고 있던 우라베라는 남자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패러다임 X를 비롯하여 여러 신기술들을 선도하고 있는 아마미 시의 최중요 기업 아르곤 소프트웨어에서 '무언가'를 탈취하고자 움직이던 데빌 서머너였습니다. 우라베는 본인이 찾던 것을 탈취하여 자신 소유의 GUMP에 저장하는 데 성공했으나, 자신을 뒤쫓아온 피네건이라는 남자에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하지만 우라베의 GUMP는 파괴되지 않았으며, 그가 죽기 직전 패스워드를 걸어 자신이 찾아낸 것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 GUMP가 흐르고 흘러 리더의 손을 거쳐 주인공 앞에 다다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우라베의 기억을 엿본 주인공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그 속에 있던 '무언가'와 접촉합니다. GUMP에서 반짝이는 빛의 형태로 튀어나온 그것은 소꿉친구 히토미의 몸을 빌려 자신을 '네밋사'라고 소개합니다. 졸지에 히토미와 네밋사, 두 인격체가 한 몸에서 공존하게 된 상황 속에서 주인공은 아마미 시를 둘러싼 거대한 음모와 맞서게 됩니다. 대부분의 기억을 잃은 네밋사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아르곤 소프트웨어의 진상을 파헤치며 악의 데빌 서머너 조직인 팬텀 소사이어티와 대립하게 되는 것이 소울 해커즈의 줄거리입니다.


줄거리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역시 발달된 도시를 바탕으로 미래 기술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울 해커즈의 특징을 보다 잘 설명하기 위해 다시금 전작 이야기를 하자면, 전작 데빌 서머너에서는 당시의 현대 사회에 여신전생의 요소들을 녹여냈습니다. 거기에 성인들을 위한 하드보일드 여신전생을 표방한 만큼 성인 사립 탐정인 주인공이 도시를 누비는 형식의 전개였습니다. 세가 새턴의 성능을 십분 활용하여 기존 진 여신전생의 단조로운 맵 그래픽에서 한 단계 진보를 이뤄, 실사처럼 리얼한 그래픽의 3D 던전을 표현해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신전생 특유의 어둡고 오컬트적인 분위기를 유지했습니다. 공사 현장이나 도서관, 주택가나 병원, 경찰서 등을 던전으로 삼아 팬텀 소사이어티를 비롯해 정치인 등의 위조 신분으로 현대 사회에 숨어 있는 악마들과 싸우는 스토리가 전작의 매력이었습니다.


진 여신전생 데빌 서머너의 그래픽


https://youtu.be/Rm0c8DDaGKY?si=jh7dAuQ7mr-kmiTA


오프닝 영상만 보더라도 데빌 서머너가 보이고자 한 분위기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특히나 게임 속에 삽입된 실사풍 영상과 게임 플레이의 연결이 매끄럽게 이어져 있어, 마치 TV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게임 내내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 소울 해커즈의 오프닝 또한 보고 넘어갑시다.


https://youtu.be/-kGpGqpAR3U?si=OE6KEazXMu35VVwp


https://youtu.be/jxGl-En9Ffw?si=alouoOhFhJ5uSrOF


3DS 판 오프닝은 2012년에 나온 만큼, 서브컬처 느낌이 물씬 나는 애니메이션 오프닝이 되었습니다만 두 오프닝 모두 본작의 매력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오프닝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3DS판 오프닝은 게임을 전부 플레이하고 나면 '이게 이 장면이었구나' 소리가 나올 만큼 게임 속 장면들을 잘 옮겨 놓았습니다. 오프닝을 통해 바로 느낄 수 있는 본작의 특징은 역시나 상술한 미래 기술, 그리고 조연 캐릭터들의 캐릭터성 강화를 통한 더욱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입니다. 또한 게임 플레이를 통해 ATLUS가 추구하던 던전 RPG 여신전생으로서의 완성형이라는 감상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상이 제가 느낀 소울 해커즈만의 특장점이며, 이것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파고들어 봅시다.




이하 스포일러 주의!




매력적인 스토리텔링과 캐릭터



데빌 서머너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으로 드라마적인 요소를 결합하고 그것을 극대화한 여신전생이라는 점을 계속 들고 있습니다. 모든 창작물에 있어 서사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인과 관계나 배경 설정 등의 밀도가 얼마나 촘촘하느냐에 따라 가장 원초적인 몰입도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게이머들의 풍조가 바뀜에 따라 요즘 게임에서는 서사가 그리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연출과 내러티브가 훌륭한 작품은 호평받고 있습니다. 저 역시 게임에서 스토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큼, 소울 해커즈의 서사와 그 몰입도가 훌륭했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고 싶습니다. 특히나 주목할 만한 것은 비전 퀘스트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이 아니라 다른 캐릭터의 시점으로 게임을 즐기며 사건의 내막을 파악하고, 그것이 주인공의 게임 플레이와도 연결되는 비전 퀘스트는 그 자체로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근래의 게임에서는 각양각색의 회상이 있다지만 이 시스템 또한 그런 연출들의 전신이 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우라베의 비전 퀘스트로 돌입하며 나오는 삽입 영상입니다. 마치 영화의 도입부를 보는 듯합니다. 요즘은 게임에서 이런 연출이 흔하다 못해 진부하기까지 하지만 당시로서는, 그리고 여신전생 시리즈로서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스토리 또한 흥미진진합니다. 우라베는 본디 악의 데빌 서머너 조직인 팬텀 소사이어티의 실력 있는 전투원이었으나, 자신의 일에 회의감을 느끼고 팬텀 소사이어티를 등지게 됩니다. 하지만 팬텀 소사이어티는 우라베의 배신에 대한 응징으로 그의 가족을 몰살시켰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우라베는 누군가(레드맨)의 의뢰를 받아 아르곤 소프트웨어 회사에 있는 무언가를 탈취하게 됩니다. 그 무언가가 바로 네밋사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GUMP에 네밋사를 담는 과정에서 용량이 부족한 나머지 데빌 서머너의 필수 요소인 악마 소환 프로그램을 삭제하고 맙니다. 아르곤 소프트웨어 빌딩에서 도망치기만 하면 다 끝나는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긴 했습니다만, 우라베는 도주 과정에서 자신을 쫓아온 팬텀 소사이어티의 실력자 피네건과 마주하게 됩니다. 악마 소환 프로그램을 삭제한 탓에 피네건과 맞설 수 없었던 우라베는 옥상으로 도망친 뒤 자신의 GUMP에 비밀번호를 설정합니다. GUMP 안에 있는 네밋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때 플레이어가 GUMP에 비밀번호를 직접 입력하게 되며, 이후 비전 퀘스트를 마치고 현실로 되돌아온 플레이어는 이때 설정한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GUMP의 잠금을 해제해 네밋사를 깨우게 됩니다. 하여간 옥상까지 뒤쫓아온 피네건에 의해 우라베는 살해당하고 맙니다. 2025년인 지금 봐도 재밌고 흥미진진한 시나리오입니다. 현대 사회를 배경으로 느와르적 스토리를 그리는 데빌 서머너 시리즈에 걸맞는 인트로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이런 스토리라인이 의미가 있다고 한 이유는 기존 여신전생 시리즈의 스토리 때문입니다. 디지털 데빌 스토리 여신전생 1, 2는 스토리라고 할 것이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은 작품이었으며, 진 여신전생 1과 2는 전작에 비해 스토리 라인의 구성도 치밀해지고 그 재미도 상당하였으나 너무 거시적인 이야기를 다뤄 이야기가 급전개되고 붕 떠버린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파괴되고 신과 악마의 장대한 전쟁을 다루는 만큼 세부적인 서사나 캐릭터의 매력을 뽐낼 수 없다는 점이 기존 여신전생 시리즈 스토리라인의 맹점이었습니다.


최근 발매된 진 여신전생 5마저도 부실한 스토리라인으로 인해 엄청난 비판을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문제인 것 같기도 합니다. 애초부터 ATLUS가 진 여신전생 시리즈를 2편으로 끝내고 if를 출시하며 페르소나나 데빌 서머너 등의 다른 길을 모색한 이유도 이런 거시적 대담을 다루는 것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빌 서머너 시리즈에 성인들과 코어 팬층이 만족할 만한 서사성을 대거 추가하여 호응을 얻어내고자 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부족했던 조연 캐릭터들의 개성을 보강하는 것도 같이 이뤄졌습니다. 진 여신전생 1, 2편까지만 하더라도 주인공과 히로인 외에 조연 캐릭터들은 대부분 일회성으로 쓰였으며 별다른 캐릭터성 또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 장대한 세계관을 다루기도 바쁜 와중에 캐릭터 하나하나에 기울일 정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 데빌 서머너 시리즈는 현대를 배경으로 그리는 드라마인 만큼 응당 캐릭터 하나하나와 그들의 서사에 신경을 써서 설득력을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두 번째 비전 퀘스트와 세 번째 비전 퀘스트에서도 입체적인 캐릭터 묘사와 영화적 연출은 계속 이어집니다. 두 번째 비전 퀘스트로 엿보게 되는 삶의 주인공인 유다 싱은 팬텀 소사이어티 소속 데빌 서머너입니다. 자신의 이름이 예수를 배반한 유다이기 때문에 그를 반면교사로 삼아 배신자가 되는 것을 혐오하며 조직에 충성하고자 하는 남자였습니다. 상부로부터 공항에 나타난 악마를 쓰러뜨리라는 임무를 하달받고 이를 수행하지만, 도중에 만나는 레이 레이호우(전작 데빌 서머너의 주인공인 쿠즈노하 쿄우지의 파트너)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망설임과 회의를 갖게 됩니다. 결국 그것이 화근이 되어 공항을 점거한 원흉 악마를 쓰러뜨렸음에도 그 악마가 죽어가며 일으킨 폭주에 휘말려 사망하고 맙니다. 하지만 유다의 영혼과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는 바람은 여전히 공항에 남아, 훗날 공항을 찾게 된 주인공이 폐허 속에서 유다의 COMP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 유다의 COMP를 찾을지 말지는 플레이어의 선택이지만, 찾게 된다면 가질 수 있는 악마의 수인 데빌 스톡이 늘어나게 됩니다. 세 번째 비전 퀘스트 또한 그 속에서의 선택에 따라 최종 보스의 공략법이 바뀌는 등 입체적 게임을 구성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작중 과거 시점에서 일어났던 일을 플레이어가 직접 체험하게 한다는 것으로 스토리텔링을 보완했다는 본질적 장점 또한 여전히 중요합니다.


기존 작품에 비해 강화된 캐릭터의 개성은 비전 퀘스트 속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동료를 비롯하여 기타 조연 캐릭터까지도 고유한 매력을 갖게 했습니다. 올드 팬들은 이를 두고 '캐릭터 게임 같다'며 이를 비판하기도 했으나, 후술하겠지만 이 작품이 현대 페르소나 시리즈의 전신이 되는 만큼 오히려 캐릭터 게임으로서의 가능성을 열었다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디스토피아 속에서 늘 고독했던 기존 여신전생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소울 해커즈의 주인공이 속한 해커 그룹 스푸키즈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주인공과 함께합니다. 그것이 전투원으로서 파티에 합류하는 형태는 아닐지라도, 각 시나리오에서 캐릭터들이 갖는 입지가 명확하다는 점, 그리고 난관을 함께 헤쳐나간다는 것이 특별합니다. 물론 진 여신전생 시리즈에서도 주인공과 함께하는 인간 동료들은 있었지만 결국 이들은 모두 신과 악마에게 놀아나 주인공과 적대하게 되는, 나쁘게 말하면 장기말과도 같은 위치였습니다. 배경 서사나 캐릭터성 자체가 깊게 묘사될 기회 또한 적었습니다. 반면 스푸키즈 멤버들은 각자의 개성이 매우 뚜렷합니다. 늘 침착하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리더인 스푸키, 디코드 등에에 능하고 정보력이 풍부한 런치, 허당끼 있으면서도 무기에 관련한 지식으으로 주인공을 돕는 분위기 메이커 식스, 마찬가지로 팀의 분위기 메이커이자 식스와 개그 신을 연출하는 유이치까지 모두가 지금 봐도 매력적인 캐릭터들입니다.


동료들은 제각각의 고뇌를 안고 있으며, 메인 스토리가 진행되는 동안 직간접적으로 이것을 해소하며 성장하게 됩니다. 당시 ATLUS로서는 이례적으로 엔딩 이후 멤버들의 미래 계획을 묘사하는 후일담을 제시하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캐릭터 어필을 위해 힘썼다는 느낌입니다. 이는 영화나 드라마적 연출을 채택하고 있다는 특징과 맞물려서, 스푸키즈가 아지트로 삼는 트럭의 트레일러에 폭발물이 설치된 상황에서 이것을 해체하고 트레일러째로 탈출하는 장면 등에서 유저로 하여금 색다른 즐거움을 느끼게 합니다. 캐릭터들이 매력적인 만큼 이들과 함께 고난을 넘는 순간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한편 세기말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밝은 분위기와 희망찬 결말을 제시했다는 점또한 의미가 있습니다. 더욱이 시종일관 음울하고 퇴폐적인 여신전생 계열 게임임에도 그렇다는 것이 특별합니다. 비극적인 장면도 이전 작품들에 비해 이례적일 만큼 크게 줄었습니다. 이 역시 기존 시리즈에 부족했던 대중성을 더욱 확보하기 위한 특책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시리즈 10주년을 맞아 여신전생과 그 악마의 세계를 더욱 많은 유저풀로 확장시키기 위한 시도로 보이지만, 90년대 말을 휩쓸었던 세기말 풍조 속에서 이런 분위기를 고수했다는 점은 현대에 이르러 이 작품을 평가할 때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합니다.


상술한 스토리적, 그리고 캐릭터적 요소들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내내 큰 즐거움이 됩니다. 구 여신전생 시리즈가 갖던 디스토피아적이고 고독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팬들이 반감을 갖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계속 그런 분위기였다간 지금의 ATLUS는 있을 수 없었겠죠. 도시를 누비는 활극 속에서 성장하는 청년들이라는 키워드는 훗날 페르소나 시리즈에 계승되기도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도 글의 말미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90년대가 묘사한 미래 기술과 그 이면



최근 '사이버 펑크' 장르가 흥행하는 것만 봐도 우리는 '과거가 그린 미래'에 강한 흥미를 느끼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말, 특히나 세기말에는 당시 만연한 멸망설로 인한 염세적이고 디스토피아적인 풍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90년대 전체에는 미래 기술에 대한 호기심과 희망, 동경이 깔려 있었습니다. 수많은 미디어에 큰 영향을 끼친 <블레이드 러너>나 <매트릭스>, 일본 콘텐츠로 넘어가자면 <공각기동대>나 <아키라>, 제가 좋아하는 <신세기 에반게리온>도 기술이 발달한 근미래를 그리고 있습니다.


블레이드 러너(좌), 공각기동대(우)


그러나 이러한 매체들의 배경이 되는 21세기가 도래한 지금, 우리 일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가상 현실로 뛰어든다거나, 신체 일부를 기계로 대체한다거나,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다니지도 않습니다. 물론 20세기에 비해 기술이 어마어마하게 발달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이 당시의 상상과 달랐다는 것또한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오는 간극과 상실이 사이버 펑크나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더욱 재밌게 받아들이는 원동력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미래가 오려면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할지, 어쩌면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현실적으로 들고 있으니 그 장르들을 콘텐츠로 소비하는 것에 여념이 없는 것이겠죠. 소울 해커즈의 세계가 매력적인 이유도 이것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울 해커즈가 그려낸 미래 세계는 단순히 독특하고 세련된 미래를 상상하였다는 점 외에도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실은 소울 해커즈가 제시한 미래 테크놀로지가 엄청나게 세세하고 치밀했던 것은 아닙니다. 가상현실 도시인 패러다임 X는 엄청나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기보단 새로운 형태의 던전으로 기능하는 면이 큽니다. 크립토 칩이나 해킹 등의 묘사도 게임 이름이 소울 해커즈인 것에 비하면 제법 어물쩡 넘어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해킹 자체를 사이버 공간을 아우르는 연출과 함께 묘사한 것 자체는 더없이 훌륭하긴 했습니다. 물론 이것들을 너무 상세히 그리다간 여신전생 RPG라는 것에서 주객이 전도될 수도 있으니 게임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잘 표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악의 세력과 정보전을 펼치거나 해킹을 통해 역공을 거는 등 지금 봐도 흥미진진한 부분 또한 분명히 있습니다. 또한 어찌됐건 근미래를 배경으로, 더욱이 그 안에서도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시범 도시를 그려내는 만큼 게임의 분위기 자체는 세련됐습니다. 전작의 던전은 병원이나 주택가, 지하도나 경찰서 등이었지만 소울 해커즈의 던전은 VR 미술관, 천체 박물관, 도시에 우뚝 솟은 마천루나 최첨단 공장 등으로 그 세계관의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가까우면서도 먼, 세련된 미래 사회는 소울 해커즈만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소울 해커즈만의 매력은 그 미래 테크놀로지의 이면을 무서울 만큼 잘 표현해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근미래를 묘사한 작품들은 대부분 세기말의 우울한 정서와 맞물려 인간과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그려내곤 했습니다만, 그것은 발전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뇌였던 반면 소울 해커즈는 미래 테크놀로지가 가진 어두운 이면 그 자체에 집중했습니다. 가령 근미래가 배경인 <카우보이 비밥>을 예로 들자면, 주연인 스파이크나 페이, 제트가 안고 있는 고뇌는 자신이라는 사람 자체의 과거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청산하는 과정이 미래의 기술(위상차 게이트를 비롯한 스페이스 오페라, 우주를 누비는 전투기 등)과 맞물려 재밌고 신선하게 다가온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고뇌와 서사 자체는 근미래가 아니더라도 성립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조직을 배신하는 과정에서 연인을 잃고 그것을 복수하고자 하는 스파이크의 과거가 그렇습니다. 페이 같은 경우는 우주선 사고나 콜드 슬립 등 기술이 연관되어 있지만, 이 역시 기술 자체의 딜레마라기보다는 개인의 자아 확립과 관련한 내적 갈등이라고 보는 게 더 알맞습니다.



스푸키즈의 멤버인 식스가 VR 호러 하우스에서 본인이 잊고 있던 트라우마와 마주해서 넋이 나간다거나, 학업에 지친 주인공의 여동생이 가상 세계로 도피하여 악마와 놀아나고 있는 등 지금 보자면 선견지명에 가까운 연출이 많이 있습니다. 작품 후반부로 들어가며 패러다임 X가 사람들의 영혼을 집적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악의 세력의 말대로, 여러 모브 캐릭터들이 현실 세상을 제쳐 놓고 패러다임 X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영락없이 현대의 인터넷 중독과 비슷한 양상입니다. 물론 문자 그대로 사람의 영혼을 빨아먹는다고 해도 좋을 만큼 심각한 중독성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 인터넷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ATLUS의 선견지명은 웃음이 날 만큼 정확했습니다. 소울 해커즈의 출시 년도인 1997년 당시 일본의 인터넷 보급률이 4.5%에서 7%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 정도의 미래를 내다본 혜안은 신기할 지경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소프트웨어 및 네트워크 기술의 절대자라는 점에서 빌 게이츠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는 것이 불 보듯 뻔한 카도쿠라의 대사입니다. 저는 이것이 21세기의 네트워크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너무나도 잘 묘사했다고 생각합니다. 소울 해커즈의 개발 시기는 윈도우 95가 만들어지고 컴퓨터가 퍼스널 컴퓨터, 즉 PC라는 이름으로 개인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비로소 모든 개인에게 정보화 시대가 태동하던 시기에 이런 스크립트를 작성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저는 놀랍습니다. 물론 현재 21세기는 컴퓨터보다도 더욱 작은 스마트폰이 보급화되어 모두가 언제 어디서든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다는 점, 사이버 공간은 비단 중독뿐만이 아니라 개인 정보 침해나 사기 등 훨씬 더 세분화된 문제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는 점 등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도 많습니다만 무서울 만큼 정확히 들어맞춘 것도 있습니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고 넘나들며 사유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것 자체가 소울 해커즈가 갖는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컴퓨터 기술을 통해 악마를 소환한다'라는 여신전생 시리즈의 근본적 컨셉과 고도로 발달한 네트워크 기술로 이뤄진 신도시라는 배경이 너무 잘 맞아떨어진다는 점도 특별합니다. 해킹을 비롯한 테크놀로지와 오컬트는 으레 대립되기 마련인 요소입니다만 이것이 밀도 있게 얽혀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는 것이야말로 소울 해커즈의 개성입니다. 더 거시적으로 본다면 여신전생 시리즈의 컨셉 자체가 갖는 특별함일 수도 있겠습니다.



소울 해커즈는 TV CM에서 전뇌전율(電腦戰慄) RPG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습니다. 전뇌가 으레 컴퓨터 기술 등을 칭하는 중국계 일본어라는 것을 생각하며 소울 해커즈에서 강조하는 '소울', 즉 영혼의 상징적 의미를 같이 고려해 보면 이것 또한 재밌습니다. 레드맨은 게임 내내 주인공을 '강한 영혼을 가진 자'라고 부르며 악의 세력의 목표 또한 사람들의 영혼을 수집하는 것으로, 게임 전반에 걸쳐 영혼이라는 요소가 제목처럼 깊게 얽혀 있습니다. 전뇌 공간과 영혼이라는, 상반되는 두 모티브를 연결하는 것으로 소울 해커즈는 그 세계관의 특별함을 명확하게 했습니다.



게임성도 놓치지 않았다



상술한 모든 가치들은 게임성이 바탕이 되어야 의미를 갖습니다. 그야 게임인데 게임 자체가 재밌지 않으면 그 무엇이 의미가 있을까요! 소울 해커즈는 저보다 나이가 4살이나 많은 게임이지만 게임성 자체로도 흠잡을 구석이 없었습니다. 이는 전작인 데빌 서머너를 포함하여 찬사를 받아야 마땅한 부분이겠습니다. 우선 절묘한 난이도 조절을 들고 싶습니다. 여신전생 시리즈는 본래 하드코어한 난이도로 명성이 자자한 게임입니다만, 소울 해커즈는 그런 전통적 어려움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플레이하는 데 있어서 불쾌하지 않을 만큼의 난이도를 견지했습니다. 우선 던전 안에서 세이브를 할 수 있게 지원해 주는 인스톨 소프트 [백 어퍼]의 존재로 게임이 상당히 편해졌다는 점은 물론이고, 네밋사를 마법 스탯 위주로 육성한다면 강력한 대미지를 통해 필드 전투며 보스전이며 모두 든든한 해결사의 면모를 보입니다. 특히 전격계 네밋사를 육성하여 메기도를 배우게 되는 시점부터 게임이 상당히 편해졌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긴장감 없고 쉬운 난이도의 게임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공략법이나 대처 아이템이 없으면 맞서기 어려운 특정 보스들도 있으며, 그냥 대미지 자체가 너무 강력해서 버프와 디버프를 쌓기도 전에 주인공이 당해 게임 오버되는 경우도 잦습니다. 이는 주인공 자체가 약하다는 점도 한몫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난이도의 밸런스가 유지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으며 검과 총, 그리고 아이템 사용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검 공격 자체의 대미지나 명중률이 높지 않고, 어느 한 스탯에 포인트를 몰아서 키우자니 걸리는 점들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속 스탯이 낮은 상황에서는 선공을 빼앗겨 속수무책으로 당할 확률이 높고, 내 스탯이 너무 낮았다간 한두 대 맞는 것으로 사경을 헤멜 수 있습니다. 마 스탯은 특정 장비를 착용하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올려아 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무드 계열의 마법으로 주인공을 다짜고짜 즉사시키는 적, 기술 '바이츠 더 더스트'로 폭탄 상태이상을 건 뒤 불꽃 마법으로 폭파시켜 단숨에 파티를 전멸시키는 적 등 곳곳에 강적이 널려 있어 필드 전투에서도 긴장을 풀 수 없습니다. 고전 여신전생의 하드한 재미는 유지하면서도 불쾌할 수 있는 점들을 덜어낸 좋은 난이도 구성이라고 느꼈습니다. 후반에 이르러서 장비와 스킬이 갖춰지며 난이도가 쉬워지는 걸 느끼는 것또한 일종의 성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신전생식 재미가 잘 녹아 있습니다.


제가 유독 신선하게 느꼈던 점은 풍부한 악마 요소들입니다. 우선 악마 대화의 볼륨 자체가 굉장히 방대합니다. 특유의 정신나간 센스를 바탕으로 다양한 대화 패턴이 있으며 이전에 나눴던 대화를 바탕으로 다음 전투에서 말을 걸면 대화가 이어지기도 하는 등, 최신작인 진 여신전생 5와 비교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재미의 악마 대화를 선보입니다. 자이브 토크 없이 대화가 통하지 않는 악마를 설득한다거나, 운 좋게 악마가 원하는 아이템을 제공하여 동료로 맞이하는 등의 즐거움은 역시 여신전생 시리즈 고유의 재미입니다. 악마 요소의 연장선으로 충성도 시스템 또한 짚고 넘어가야만 합니다. 데빌 서머너 시리즈의 상징적 시스템인 악마 충성도가 저는 참 재밌었습니다. 각 악마별로 성격이 있으며, 전투 시 성격에 맞는 행동을 지시하는 것으로 충성도를 올려 악마와의 유대감을 갖게 만드는 일련의 과정이 즐거웠습니다. 이를테면 성격이 '우애'인 악마는 가드나 회복 마법을 사용하면 충성도가 올라갑니다. 충성도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격에 맞지 않는 지시를 하면 말을 듣지 않으며 충성도가 내려갑니다. 이것이 전투를 한층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였습니다.


물론 중요한 상황에서 말을 듣지 않는 바람에 혈압이 솟구치는 일도 있었습니다만, 충성도가 높은 악마들이 '당신의 지시라면 따르겠습니다'며 싸워 주는 진풍경에 감동을 받지 않을 여신전생 유저는 없을 것입니다. 특히나 충성도 맥스의 우애 성격 악마는 주인공이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공격으로부터 감싸 주기도 합니다! 이제는 포켓몬스터에서도 비슷한 연출을 찾아볼 수 있지만 이런 고전 게임에서 발견하는 것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기 마련입니다.



한편 여신전생 시리즈로서는 이례적으로 아메리카 원주민 신화를 메인으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또한 독특한 매력입니다. 레드맨이나 네밋사, 그리고 최종 보스인 마니투는 모두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화에서 등장하는 이름들입니다. 마니투는 알곤퀸 신화에서 묘사되는 '근본적인 생명력'입니다. 어디에나 존재하고 모든 사건에 관여하는 초자연적 힘의 관념인 마니투의 여동생이 네밋사라고 하더군요. 주인공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던 레드맨은 원주민 신화 속 구세주이며, 스푸키는 아메리카 신화 속 트릭스터의 성격을 지닌 정령입니다. 늘 여신전생을 관통하는 기독교 신화나 인도 신화가 아니라 색다른 아메리카 신화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도 소울 해커즈의 특별함입니다.


하지만 고전이니만큼 불편한 점들도 여럿 있습니다. 우선 어느 정도의 반복 플레이(노가다)를 통해 강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작의 인카운터 확률이 워낙 높으니 필드에서 나오는 적들로부터 도망가거나 에스트마 등을 사용하지 않고 계속 싸운다면 레벨이 부족할 일은 없습니다. 제가 플레이하며 가장 아쉬웠던 건 UI의 불편함입니다. 악마 합체나 스테이터스 창에서 악마가 보유한 기술의 상세 정보를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정말 이름만 보고 기술을 유추해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저는 이것 또한 나름의 재미라고 여길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게이머들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공들여 그린 악마 일러스트를 도트로밖에 볼 수 없다는 점도 아쉽습니다. 전서나 스테이터스 창에서라도 볼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외에도 고전 게임 특유의 불친절함과 불편한 점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습니다만, 저는 고전 게임에 익숙하여 플레이를 마친 지금 시점에서 크게 떠오르는 점은 없습니다.


전체적인 감상은 구작 여신전생 RPG의 완성형이라는 느낌입니다. 1인칭 던전을 탐험하며 COMP를 사용하고, 하드코어한 난이도 속에서 마그네타이트를 통해 악마를 관리하며 주인공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전통적 방식의 여신전생을 소울 해커즈가 완성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눈에 띄게 더 진보할 시스템도, 약점이라고 할 만큼 허술한 시스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과연 시리즈 10주년 기념과 동시에 시리즈 확장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작품 답습니다.




소울 해커즈로부터 미래의 ATLUS 게임에게



좌측부터 하시노 카츠라, 소에지마 시게노리, 메구로 쇼지


이제서야 설명하는 것이 우습게 느껴질 만큼 중요한 사실입니다만, 소울 해커즈는 대대적인 혁신을 위해 신규 개발진들이 여럿 투입되었습니다. 시스템 디자인은 하시노 카츠라, 서브 캐릭터 디자인 및 인게임 캐릭터 그래픽에 소에지마 시게노리, 음악에 메구로 쇼지가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들은 모두 훗날 <페르소나 3>부터 시작하여 <메타포: 리판타지오>까지 ATLUS 게임의 흥행을 책임지는 개발진이 됩니다. 상술한 소울 해커즈의 비판 중 '캐릭터 게임 같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만, 3편 이후의 페르소나 시리즈부터 메타포까지 모두 '캐릭터 게임'의 요소로 성공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소울 해커즈는 그 시발점이나 다름없습니다.



청년들이 힘을 합치고 이계를 탐험하다 난관에 봉착하며 와해되고 화해하여 성장하는 소년 만화적 전개는 페르소나 5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흐름이 시리즈 흥행의 원동력이나 다름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 속에서 매력적인 캐릭터 디자인과 스타일리쉬한 음악 또한 시리즈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현재 JRPG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터줏대감인 페르소나 시리즈의 최중요 인사 3인방이 처음 합을 맞춰 본인들의 색채를 보였다는 것, 나아가 향후 ATLUS 게임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것이 소울 해커즈의 의의입니다.


잘 지내고 있구나 로메로, 피네건


위 세 사람이 ATLUS의 차기 메인 스트림 RPG로 개발한 <메타포: 리판타지오>에서 아키타이프 중 소울 해커와 데빌 서머너가 있는 셀프 오마주 또한 이들에게는 특별한 의미일 것입니다. 데빌 서머너 시리즈의 등장인물들은 <데빌 서바이버> 시리즈 속 경매장인 데빌 옥션에서 입찰자의 이름으로도 등장하며, 데빌 서머너 소울 해커즈에서 완성된 구작 여신전생식 RPG는 훗날 <진 여신전생 스트레인지 저니>에서 다시 한 번 부활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데빌 서머너 시절 작업된 방대한 양의 악마 디자인과 일러스트는 <진 여신전생 4>와 <진 여신전생 4 FINAL> 연작에서 다시금 활용됩니다. 생각해 보면 진 여신전생 4 연작에서도 전투 상황에서의 1인칭 시점을 채택하고 있는 부분이나 특수한 형태의 COMP(건틀렛, 스마트폰)을 활용하는 부분, 현대 사회를 바탕으로 한 어두운 묘사 등을 통해 데빌 서머너 시리즈의 향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진 여신전생 4 연작은 진 여신전생 1편과 2편의 셀프 오마주 내지는 리메이크의 성격이 더욱 강하긴 합니다만, 악마 사냥꾼 조합에서 사냥꾼 랭킹을 보면 데빌 서머너에 등장하는 그리운 이름들이 보입니다.



ATLUS는 데빌 서머너 시리즈를 잊지 않았다는 것을 몸소 보이며 아예 25년만의 속편인 <소울 해커즈 2>를 발매하기도 했습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1인칭 던전 RPG가 아니라 3인칭 RPG로 출시되었습니다. 핵심 주제 또한 이제 우리 삶의 일부가 된 가상현실에서 인공지능으로 넘어가게 됐습니다. 최첨단 테크놀로지에서 태어난 인지를 넘은 존재, Aion이 세상의 멸망을 막고자 주인공 링고와 피그를 창조해 파견시켰다는 설정이라고 합니다. 과연 소울 해커즈 2에서도 ATLUS의 선견지명이나 혜안을 볼 수 있을까요? 저는 플레이하지 않아서 단순한 궁금증에 그칠 따름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소울 해커즈는 단순한 여신전생 시리즈 게임이 아니라, 구작 여신전생 시리즈와 페르소나 시리즈를 비롯한 현 21세기 ATLUS RPG를 연결해 주는 가교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시리즈 10년의 노하우가 담긴 당시 ATLUS 기술의 집대성, 동시에 향후 ATLUS 게임의 비전을 제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ATLUS는 언제나 본인들이 잘 할 수 있는 것, 백 퍼센트 역량을 보여줘야 하는 부분을 너무나도 잘 판단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이 강점을 바탕으로 현재까지 단단한 코어 팬덤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요즘 ATLUS 게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각종 혁신을 통해 미래로의 도약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또한 특별합니다. 후술하겠지만 역시 제가 생각하기로 근래의 ATLUS는 정체됐다는 감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미 시를 떠나보내며


어찌저찌 소울 해커즈 리뷰도 마무리하게 됐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90년대 게임은 너무 올드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것이 오산이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만드는 좋은 게임이었습니다. 설정이나 캐릭터, 서사와 음악을 비롯한 모든 게임 플레이가 너무 세련됐고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나간 명작이라는 평가가 잘 어울립니다. 몇 번이고 게임 오버를 당하는 구간이나 강적도 물론 있었지만 별로 불쾌하지 않았네요. 결국 소울 해커즈도 청년들이 거대한 음모에 맞서며 이 과정에서 여러 사건을 거쳐 성장하는 내용입니다. 본 리뷰 속에서 페르소나 시리즈와의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고 한 만큼 엔딩 또한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추억이 있는 한!'으로 요약되는 소년 만화 식 엔딩이었습니다만, 이게 왜 이리 뭉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최근 나이를 먹어가며 페르소나 시리즈의 작위적인 전개가 조금 물리는 감이 있었습니다. 특히나 5편의 스토리가 아쉬웠던 점이 큰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후반부 전개에 대해 비판을 하지만, 청소년들이 사회에 사적 제재를 가한다는 주제 자체에 저는 물음표를 갖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페르소나 시리즈는 현재 5편으로 최고점을 찍은 뒤 콜라보레이션이나 모바일 게임 출시, 리메이크에서 그치는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3편과 4편이 어마어마한 흥행을 기록하며 ATLUS를 메이저 게임사로 다시 한 번 급부상시킨 만큼 보증된 흥행 수표인 리메이크를 건드리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만, 어쩐지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사라지질 않네요. 상술한 주요 개발진 3인방이 메타포: 리판타지오에 착수했던 것도 비슷한 느낌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과장 좀 보태 '프로토타입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소울 해커즈가 깊은 인상으로 다가온 것 같습니다.(물론 페르소나 시리즈의 첫 작품인 여신이문록 페르소나가 1996년 출시되었으니 조금 어이없는 소리이긴 합니다)



게임의 아웃트로에서 나오는 메시지입니다. 당연한 조언이지만 이 메일을 읽으며 '이 게임을 플레이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 걸 보면 역시 ATLUS의 서사에는 유저를 휘어잡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게임이 워낙 좋았던 탓에 소울 해커즈 2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썩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미 소울 해커즈의 감성에 완전히 매료된 저로서는 그 후속작이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잠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하자면, 정말이지 저 메일에서 말하는 대로 요즘 제 장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있어야 비로소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는 것이었군요. 던전 속을 헤매는 것 같은 이 감정 또한 소중한 것들이며 언젠가 그리워할 날이 올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이 감정은 당시 게임을 개발하던 하시노 카츠라, 소에지마 시게노리, 메구로 쇼지 모두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막 커리어를 시작한 그들 역시 장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공존하고 있었겠죠. 하지만 그것을 양분으로 삼아 지금처럼 화려한 경력의 개발자가 됐을 것입니다. 그들 역시 자신이 살아갈 방법을 찾아 스푸키즈 동료들과 헤어진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살아갈 방법을 찾아서 스푸키즈 멤버들이 각자의 길을 떠난 것처럼 지금은 여신전생 시리즈를 떠나 다른 길을 걷고 있네요. 소울 해커즈가 전한 메시지는 비단 플레이어뿐만 아니라 이들 개발진에게도 너무나 소중한 이정표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자신 있게 저만의 살아갈 방법을 찾아서 스푸키즈를 완전히 떠나보낼 수 있는 날도 분명히 오겠죠. 하지만 지금은 그런 수준까지 성장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동료들과 헤어지는 게 왜 이리 아쉬울까요? 나이를 먹더니 감수성이 는 건지 게임 속 친구들과의 이별이 너무 애틋합니다. 마음이 물에 푹 젖은 솜이 된 것만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시기에는 그저 게임에 과몰입하는 괴짜가 주절거리는 것처럼 보이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이런 사람인걸요!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성장하고자 하는 마음은 분명합니다. 스푸키즈의 일원으로서 멤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도록 매 순간 노력해야겠습니다.


지난 일기에 적었던 것처럼 역시 저는 뭔가 가로막히거나 막막할 때마다 옛 것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와 연결된 과거인 소울 해커즈가 참 좋았습니다. 향수로 인해 과거를 표현한 현재가 가득한 요즘 세상에서 미래를 표현한 과거를 체험하는 일이 인상적인 건 당연한 일인 것 같기도 합니다. 저보다 네 살이나 많은 게임인 만큼 연장자에게서 한 수 배운 느낌입니다. 여신전생과 페르소나, 즉 ATLUS 게임을 사랑하는 팬이라면 한 번쯤 플레이해봐도 좋은 명작이었습니다. 슬슬 이 긴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정들었던 아마미 시를 떠나기 위해 이삿짐을 싼다면 이런 기분이겠죠. 하지만 말한 것처럼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해 나가려 합니다. 빠른 시일 내에 다른 작품 리뷰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도처에 암약하고 있을 악마의 위협과 사악한 데빌 서머너들을 조심하세요!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v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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