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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Dec 11. 2021

이번 내리실 역은, '환승연애'입니다 / 박브이

'덕'업상권

  일본에서 방영되었던 <테라스하우스>시리즈를 재밌게 보았다. 회사원, 미용사, 인디 아티스트, 건축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제작진이 준비한 근사한 집에서 함께 살아가며 생기는 이야기를 패널들과 함께 관찰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출연자들 사이에 생기는 두근거리는 기류나 날 서는 갈등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각자의 인생관과 인간 군상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테라스하우스>는 아쉽게도 여러 논란 끝에 찝찝한 결말을 맞고 말았지만, 비슷한 포맷 위에 '연애'와 '이별'이라는 키워드를 얹은 프로그램이 국내에 등장했다. TVING의 오리지널 콘텐츠로 제작된 <환승연애>다.


  사실 화제가 되었을 무렵 주변으로부터 추천을 받았었지만, 선뜻 눈이 가지는 않는 프로그램이었다. 연애 상대를 갈아 탄다는 의미의 '환승' 이라는 단어의 자극이 썩 유쾌하지 않았거니와, 지금까지 국내에서 제작되었던 작위적인 연애 관찰 예능에 대한 피로감과 <테라스하우스>의 아류처럼 만들어져 온 ‘합숙 관찰’ 프로그램들에 대한 실망감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종영된 후 시간이 지나고나서 우연한 기회에 1화를 보게 되었고, 이내 곧 부끄러워졌다. 보지도 않고 편견만 가지고 짐작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아무래도 <환승연애>라는 프로그램의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출연자들의 관계이다. 기존의 이른바 ‘짝짓기 예능’에서는 주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모여 그때부터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과는 달리, <환승연애>에서는 과거에 연인이었지만 각각의 이유로 이별을 겪은 5쌍의 남녀가 한 집에 모인다. 이들은 적어도 한 번 이상의 이별을 겪은 사람들이고, 그 상대방이 구성원 안에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프로그램의 긴장감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들이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맺어감에 있어서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같이 출연자들 사이에 사전에 형성되어 있는 풍부한 서사적 관계는, <환승연애>가 연애를 다루는 방식에 차별점을 제공하기도 한다. 기존의 연애 관련 예능은 연애를 일종의 ‘사건’으로서만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서로 처음 만난 사람들의 연애가 시작되려는 시점에만 주목하다보니 그 단계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이나 에피소드 자체만을 부각시키게 된다. 서로 마음이 통했을 때의 짜릿함이나 엇갈렸을 때의 아쉬움 등 출연자의 즉각적인 반응을 보고 공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까지는 관심이 닿기 힘들다.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와 이어졌는가다. 그들의 실체는 보이지 않을 뿐더러 너무 멀리 있다.


  반면, <환승연애>는 연애를 사건이 아닌 '과정'으로 그린다. 시작만이 아닌, 시작을 가능케 하는 그 이전의 끝을 동시에 담아내는 것이다. 현재의 만남 이전에 이별이 배경으로서 자리잡고 있다. 현재의 만남에서 밟아가는 하나 하나의 단계보다는 그 전의 이별, 더 거슬러 올라가 그 이별 이전의 만남이 각각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지를 다룬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 대한 단순한 반응이나 그때 그때의 감정선의 변화만이 아닌, 각자의 연애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드러나는 출연자의 사고방식,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 사람의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준다. 이는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누군가, 혹은 본인의 이야기인 것만 같은 리얼리티를 확보해 주기도 한다.


  좋은 콘텐츠의 조건은 무수히 많다. 그 중 하나는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재생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그 이야기를 스스로 재해석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새로운 이야기로 이어지게끔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연자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서사를 토대로, 다소 특수한 현재의 상황과 관계에서 벌어지는 <환승연애>의 이야기는 결국 그것을 보는 사람 본인에게 닿는다. 지난 연애와 이별을 추억하거나 반성하기도 하고, 앞으로의 연애를 기대해보거나 다짐하게 만든다. 나는 분명 <환승연애>를 보고 있었는데, 어느샌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것이, 이제는 내가 <환승연애>를 권해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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