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들의 일곱 가지 죄

바보 만들기 -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by 예하
바보 만들기 -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이 책의 제목이 나를 사로잡았다.


삶은 향유하는 것.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하게 되는 자연스런 행위들 그 자체가 곧 삶이 아닐까.

하지만 언젠가부터 삶은 알 수 없는 개념들과 기호들로 바뀌었고 그 안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이 책의 저자는 전직 교사로서 학교의 숨겨진 교육과정이 사실은 ‘바보 만들기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교육 전문가인 교사가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과정을 소개한다.








교사들의 일곱 가지 죄


1. 혼란

-만사의 연관성을 파괴하도록 저는 가르칩니다.

-자연의 순리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어린아이가 걷기나 말하기를 배우는 과정, 해뜨기에서 해지기까지 빛의 변화... 학교의 원리는 이렇지 못합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만사, 만물 사이의 관련성을 해체하도록 가르칩니다. 체계화의 정반대 방향으로 끝없이 세계를 파편화하는 것입니다.


2. 교실에 갇혀있기


-저는 학생들에게 너희들이 있을 곳은 교실 안이니 그곳에서 나가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제가 할 일은 번호가 붙어있는 어린이들이 함께 갇혀 있는 상태를 좋아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할 일을 잘하면 아이들은 자기들이 다른 곳에 설 수 있다는 상상도 하지 않게 됩니다. 더 우월한 반을 선망하고 두려워하도록, 더 열등한 반을 경멸하도록 제가 가르치기 때문이지요. 이 능률적인 제도가 잘 돌아가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서로를 견제해가며 행진의 보조를 잘 맞추게 됩니다. 학교처럼 짜고 벌이는 경쟁판에서 정말로 가르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각자 자기 위치를 알고 받아들이게 하는 거지요.

-번호 매긴 교실의 가르침이란 모든 학생이 피라밋 속의 돌덩이처럼 정해진 자기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숫자의 마술 그 자리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3. 무관심


-저는 아이들에게 어떤 것에도 지나친 관심을 갖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종이 땡 울리기만 하면 지금까지 하던 일이 무엇이든 즉각 손을 떼도록 요구합니다. 수업 시간을 토막 내어 종소리만 울리면 수업을 마치도록 만드니, 스스로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끊임없이 방해받아 사그라질 수밖에 없지요.

-종소리의 진정한 가르침이란 어떤 일도 끝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4. 정서적 의존성


모든 권리는 권위를 가진 사람에 의해 주어지기도 하고 박탈되는 것이며 여기에는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습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이 인정해 주지 않는 한 학교 안에는 아무 권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5. 지적 의존성


-교사가 어떻게 하라고 시키기를 기다리는 학생들이 착한 학생들입니다. 자신보다 더 잘 훈련받은 다른 사람이 자기 인생의 의미를 정해주도록 기다리게 하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잘하는 학생들이란 교사가 이렇게 생각하라고 시키는 방향을 별 저항 없이 잘 따르는 학생들이고 못하는 학생들이란 여기에 저항하는 학생들이죠. 자기들이 저항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이해할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자기네가 무엇을 언제 공부할지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애를 씁니다.


6. 조건부 자신감


-아이들의 자신감이 전문가의 의견에 얽매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통지표들이 쌓이고 쌓인 무게 아래 아이들은 무성의한 타인들의 판단에 따라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7. 숨을 곳이 없다


-아이들은 자기만의 공간도, 자기만의 시간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사회를 확고한 중앙통제 아래 잡아 놓으려면 아이들을 빈틈없이 감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단절된 사실의 파편들이 아니라 의미이다

제도적 편의를 위해 토막 내놓은 시간 조각 안에서, 학생들이 살고 있는 실제 세상에서 격리된 교실 안에서
진정한 학습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인생이 서로 관련 없는 과목과 장, 절 따위로 쪼개져 있을 때 학습은 이뤄지지 않는다.


자연의 질서와 순리를 깨뜨리는 강압이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이 아이들에게 뒤집어씌워지고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

처음부터 이 세상은 우리 안에 혼란으로 각인되어 있었던가?

아니면 어느 날 불쑥 쳐들어온 둔탁한 망치 하나가

내 안의 온전했던 풍경들을 조각조각 바스러뜨렸는가?

왜 학교는 온전한 삶을 가르치지 않는가.

수십 개로 조각난 삶은 암호화되어 과목명을 달고 우리 앞에 떨어진다.

그런데 그 조각들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

아무리 마스터해도 삶을 온전히 그려내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비어있는 조각들로 가득하다.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다.



지식을 직접 얻을 수 없다는 원칙


가르치는 데 더 많은 기술이 생겨났지만, 지식을 직접 얻을 수 없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교사가 조각조각 던져 주는 추상적인 지식만 배우다 보니 졸업할 때는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고 전제적 질서에 젖어 있는 사람이 되어 있다. 이런 ‘소시민’은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에게 대들 수가 없다. 설혹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한결같이 지닐 줄도 모르고 넓게 생각할 줄도 모르니까. 그래서 학교교육을 잘 받은 아이들은 비판하는 생각을 할 줄 모르고 올바르게 토론할 줄을 모른다.


어떻게 불만을 '품겠는가'. 불만의 불씨가 피어오르기도 전에 종소리가 울려 찬물을 끼얹을 텐데.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가르침이란 언제나 교사가 던져주고 우리는 받아먹는 위치를 벗어날 수가 없다. 교사의 일방적인 주입이 끝나면 다음 수순으로 학생은 그 지식을 꺼내어 되새김질해보고 싶은 능동성이 살아나는 게 자연스럽지만 이내 종이 울려 그것을 차단한다. 그리고 또 다음, 또 다음 수업이 시작되고 교사는 어김없이 새로운 지식을 들고 와 학생들에게 쏟아내고 종소리와 함께 퇴장하는 식의 반복인 것. 학교종은 학생이 지식에 능동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원천 차단해왔다. 이런 교육을 받고 자라난 소시민은 국가를 또 선생으로 여기며 자주 고분고분, 넙죽넙죽의 태도를 보인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차단당해온 세월만큼 우리는 노예로서 살아간다.



스스로는 뭘 할지 모르기 때문에 남들이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바탕으로 하나의 생활양식이 이루어져 있다

학교에서 교육된 착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뭘 어떻게 할지 전문가들의 지시를 받도록 세뇌되어 있다. 그 결과 노는 것도 입는 것도 먹는 것도 죄다 전문가들에게 의존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학교에서 이러한 의존성을 갖도록 훈련되지 않았다면 이 많은 사회사업들은 쫄딱 망하였을 것이다.



학교 밖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연령별 격리
& 교육의 직업화


학교는 아이들을 부자연스럽게 자라도록 강요하고 있다. 같은 사회계층에 속한 같은 나이 또래 아이들끼리 묶어서 감금 상태에 두는 체제에 속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반생명적인 일이다. 이 체제는 아이들을 삶의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 서로 다른 요소들 사이에 일어나는 온갖 상생상극 관계로부터 절연시켜 놓는다. 아이들을 과거와 미래로부터 단절시켜 영속적인 현재 속에 묶어 놓는 것은 텔레비전이 하는 것과 똑같은 짓이다.


학교는 우리 아이들을 데려다가 지역사회의 생활 속에서 아무런 능동적인 역할도 맡을 수 없게 붙잡아 놓는다. 아이들의 교육을 자격증 가진 전문가들의 손에만 맡겨 놓는다는 것이 바로 지역사회를 파괴하는 짓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아이들이 완전한 인간성을 가지고 자라나지 못하게 한다.


학교교육의 병리 현상은 대부분 학교가 학생들을 가로막고 붙잡아 두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자기 자신, 그리고 가족들과 마주치는 가운데 자발성, 인내력, 용기, 자존심, 사랑, 봉사 정신 같이 가정생활과 지역사회에서 배워야 할 소중한 가르침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건강한 사회에서라면 모든 사람이 발휘할 교육의 기능을 봉쇄하는 것이 교육의 직업화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사회가 아닌 조직


우리가 서로 교섭하고 있는 양태를 두고는 ‘사회’라는 말 자체가 무색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사회가 아니라 조직이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고독감에 빠져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비극 속에서 학교가 하나의 큰 배역을 맡고 있다. 사회의 계층 간 간격을 넓히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는 것. 카스트 제도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학교는 분류의 기능을 맡고 있다. 더 이상 학교에서의 훈련을 교육이라 부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교와 같은 조직은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조직은 전인격적 인간을 필요로 하기보다 인간을 분해한 조각들을 필요로 한다. 조직 안에서 기능하는 사람들은 조직이 필요로 하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을 억누르도록 요구받는다. 이것에 길들여지면 사람의 인격은 여러 개의 전문화된 조각들로 쪼개지고 그 어느 한 조각도 진정한 인간성을 담을 수 없게 된다.


조직이 사회와 다른 점은 인간들로 하여금 아주 좁은 범위에서만 관계를 갖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얄팍한 인간관계가 끝없이 되풀이되다 보면 결국은 병적인 상태에 이르게 된다. 모든 도시인들에게 익숙한 느낌, 군중 속의 고독과 같은 느낌을 가져오는 것이다. 조직 활동을 여러 개 모아 놓더라도 온전한 사회에 속한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여러분의 ‘친구들’ 또는 ‘동료들’이 여러분이 해 주는 이상으로는 여러분을 아껴주지 않는다는 느낌, 여러분이 어떤 식으로 자기 삶을 살며 어떤 희망과 두려움을 가지고 어떤 성취와 좌절을 맛보는지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는 느낌. 여러분이 ‘친구들’의 무관심을 서운해할 때, 그들이 여러분의 친구일 수 없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렇게 조직 생활의 가식 밑에서 진정한 사회를 잃어 가고 있다.


지역사회란 사람들이 시간을 충분히 두고 서로의 인간성의 모든 측면을 마주쳐 보는 곳이다. 좋은 면이나, 나쁜 면이나, 어떤 측면이나, 최고의 질을 가진 인생, 관계와 참여로 충만한 삶이 가능한 것은 그런 장소에서이다. 사회 안에는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수많은 갈림길이 있다. 따라서 정서적 보상도 그만큼 풍성하고 복잡하다. 반면 조직 안에서 관계란 사회의 모습을 연필로 그려놓은 것처럼 단조로운 것이어서 제공할 수 있는 보상의 범위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조직은 구성원들에게 정서적 자양분을 줄 능력이 없다


교육을 삶 속으로 되돌려 놓자


인류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생긴 것이 가정이었다. 다음으로 지역사회가 생겨났고 훨씬 뒤에 지역사회가 활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러 가지 조직과 제도가 만들어졌다. 무엇을 소중히 여긴다고 대부분의 조직이 꾸며서 하는 말들은 개별 가정, 온전한 인간관계를 지키는 가정에서 빌려온 가치를 표방하는 것이다.


원래 우리는 가정 내에서 그리고 이웃들과 지역사회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배우며 자라났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가르칠 줄도 알게 되었다. 가정과 지역사회 안에서 우리는 어린아이 때부터 제 몫의 의무를 책임지는 습관을 길렀고 그것을 통해 일하는 법을 깨달았다.


제도적 학교를 해체하자. 교사자격제도를 없애자. 가르치고 싶은 사람들이 배우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 재주껏 가르치게 하자. 교육이라는 사업을 개인의 일로 만들자. 자유시장 원리에 맡기자.


저자는 이를 궁극적으로 바라고는 있으나 단번에 이루어지기에는 현실성이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오늘날 현실 상황 속에서 학교만 해체해보았자, 가정으로 돌려보내 보았자 그곳에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이 없다는 걸 이미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길 밖에도 세상은 있다.

실은, 길 밖에 진짜 세상이 있다.

길 밖으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동지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