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류지향

공부로부터 도피하기, 노동으로부터 도피하기

by 예하
공부로부터 도피하기
공부로부터 도피하기는 아이들이 교육받을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는 현상을 가리킨다. 교육받을 기회로부터 스스로 달아난다는 말은 머지않아 '하류사회'로 계층이 내려가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그런 계층 하강을 지향하는 사회집단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냥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노력을 기울여서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일본 사회에서만 성립하는 공식은 아닐 것이다. 한두 명의 아이들이 아닌 또래 집단의 학력이 전체적으로 내려가고 있어 그 안에선 자기 학력이 떨어지는지 어떤지를 실감하지 못한다. 오히려 집단의 학력이 내려갈수록 경쟁 부담이 줄어 학부모들마저도 이를 심리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일본 아이들의 학력이 해마다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









모르는 게 있어도 개의치 않는 아이들


요즘 젊은 친구들의 '건너뛰기 능력'은 우리 세대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달했다. 책을 펴서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그냥 가볍게 건너뛴다. 그렇게 모르고 그냥 넘어가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자기가 모르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 결과 요즘 젊은이들에게 세상 그 자체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구멍 투성이다. 마치 치즈 덩어리처럼 여기저기 의미의 공백이 숭숭 뚫려 있다. 세상 그 자체가 구멍 투성이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 더 '의미를 모르는 것'이 출현한들 치즈 구멍이 하나 더 생긴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가볍게 넘길 수 있다. 아마도 어떤 단계에서 '의미를 모르는 것'이 그들 세계에서는 의미를 잃어버리고 만 듯하다.

무지한 채 살아도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이 사실이 '공부로부터 도피하기'라는 논제를 고찰하는 단서가 되리라 생각한다.


이미 아이들은 어엿한 '소비주체'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배움의 장에 서게 되면 첫 질문으로 "이걸 배우면 뭐에 도움이 되나요?"라고 묻는다. 어째서 아이들은 이런 실용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을까?

최근 우리는 하나에서 열까지 돈이 들어가는 생활을 처음으로 경험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각종 미디어에서 정보가 들어오는 생활도 처음이다. 돈이 돈을 낳는 경제구조 속에 완벽하게 말려들어가 있다. 아이들이 일찍부터 자립의 감각을 체득하는 것도 이러한 경제 사이클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어 '소비주체'로서의 확신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은 현재의 경제 구조가 보내오는 메시지를 여과 없이 곧바로 받고 있다. 학교가 오늘날의 사회를 가르치고자 '생활 주체'나 '노동 주체'로서의 자립의 의미를 설명하기도 전에 이미 아이들은 어엿한 '소비주체'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있다. 이미 경제적인 주체인데 학교에 들어가면 새삼스레 교육의 '객체'가 된다는 것은 아이들 입장에서 내키지 않는 일일 것이다.
- 스와 테츠지 [왕자와 공주가 되어가는 아이들]

요즘 아이들과 삼십 년 전 아이들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은 처음 사회관계에 들어설 때 노동을 통해 들어가는가, 소비를 통해 들어가는가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아이들은 노동 주체라는 형태로 사회적 인정을 받아 스스로를 세울 수 없다. 그럴 기회를 구조적으로 빼앗겼다. 오히려 지금의 아이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다. 이제는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부탁할 만한 생산 활동이 거의 없어졌다. 반면에 아이들의 소비활동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촉발된다.



소비생활을 줄여가다보면 생각보다 보이는 것들이 많다.

우리는 참 많은 것들을 돈으로 해결하고 있었기에 소비를 줄인다는 건 곧 돈으로 해결하고 있던 것들을 돈이 아닌 노동으로 대체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베란다에 작은 텃밭을 만든 이후부터 식재료란 당연히 마트에 가서 돈을 주고 사 오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재봉을 배우니 내가 입고 싶은 옷들이 무조건 비싼 돈을 주고 사야 할 무언가가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이 일어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것, 노는 것 등 웬만한 건 죄다 돈으로 직결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게 너무 당연해서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된 지경이다. 어쩌면 우린 돈을 지불하고 사야 하는 소비주체로서만이 아닌 자급자족할 수 있는, 생산주체의 자리에 설 수도 있었을 텐데. 꼭 직업적인 게 아니더라도 말이다(과거에 그랬듯). 이제는 정말 가정에서 생산활동을 할 게 별로 남아있지 않다. 그 시간에 더 일을 하고 그 일을 통해 번 돈으로 소비하며 모든 것을 대체한다.


우리의 생산활동이 그렇게나 해로운 것이었을까.

왜 죄다 돈을 주고 사야 하는 품목이 되어 버렸을까.


어쩌면 우리가 돈으로 사버리는 행위와 맞바꾼 것은 생산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발견하게 될 삶의 놀라운 비밀과 그 과정에서의 관계 맺음, 그로 인해 밝아지는 시야, 잠깐의 쾌락이 아닌 끊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의 즐거움 등, 은 아니었을까.


우리 삶에서 돈을 빼고도 우리는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게 많다. 돈이란 종이 쪼가리가 삶과 우리 사이에서 가로채 가는 마진이 너무 크다. 다시 삶과 우리의 직거래에 눈을 뜰 때다.



돈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요즘 아이들은 무엇보다 먼저 소비주체로 자기를 확립할 것을 거의 제도적으로 강제당한다. 자녀를 적게 낳는 결과 부모, 조부모, 외조부모 등 용돈이 끊이지 않고 윤택하게 공급되어 서너 살에 벌써 지폐를 들고 물건을 사러 가는 아이들이 있다. 지금 아이들은 거의 절반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사회 경험이 물건 사기였을 것이다. 이 첫 경험의 차이는 대단히 결정적인 것이다. 아이들이 생전 처음으로 물건을 샀을 때 어떤 인상을 받았을까? '돈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일 것이다. 이 경험은 어린아이라도 돈만 있으면 어른과 대등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전능성을 느끼게 해준다.

당연히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교육 서비스를 사는 사람'이라는 위치를 무의식 중에 선점하고자 한다. 소비주체는 자기 앞에 놓인 무언가를 우선 '상품'으로 받아들인다. 소비주체에게 '자신이 용도와 유용성을 이해 못하는 상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용도나 유용성을 모르면 처음부터 아예 상품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에게는 교육의 장에서 제공되는 교육의 대부분이 그 의미와 유용성에서 아직 와 닿지 않는다.
교육의 역설은 당사자가 교육이 제공하는 이익을 교육이 어느 정도 진행될 때까지, 경우에 따라서는 교육과정이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런데 소비주체로 학교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애당초 그런 역설이 교육을 성립시키는 바탕이 된다는 사실을 모른다.



'불쾌함'이라는 화폐


아이들이 교실에서 사용할 수 있는 화폐는 불쾌함이다. 수업을 조용히 참으며 듣는 일은 아이들에게는 고역이다. 그들은 이 고역이 주는 '불쾌함'을 '화폐'로 바꾸어 교사가 제공하는 교육 서비스와 등가교환을 하려고 한다. 학교라는 곳에서 아이들이 내놓을 수 있는 화폐는 그것밖에 없다. 아이들은 학교에 불쾌함을 견디기 위해 온다. 교육 서비스가 자신들의 불쾌함과 맞바꾸어 제공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실은 불쾌함과 교육 서비스가 등가 교환되는 장소인 셈이다. 아이들은 당연히 교실에서 익숙한 '흥정'을 벌이게 된다. 자기의 '불쾌함이라는 화폐'를 '교육상품'과 최고의 교환율로 교환하려고 한다.



등가교환의 심리


그들은 그저 '자신의 불쾌함과 등가인 교육 서비스'를 요구할 뿐이다. 문제는 등가교환이 적정하게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들에게는 적절한 등가교환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이 말은 그야말로 비즈니스 마인드에 입각한 주장이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아이들의 주장은 경제적 합리성에 딱 들어맞는다.



배움이란


학교교육에 등가교환의 원칙이 적용되는 순간, 교육은 이미 교육으로 존재할 수 없다. 만약 학생들을 교육 소비자로, 다시 말해 소비주체로 인정해버리면 교육의 장에서 제공하는 배울 거리의 의미와 가치를 결정할 권리가 아이들 손에 맡겨지게 된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소비주체로서 "나는 그 가치를 알고 있는 상품만 적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구입하겠다"고 소리 높여 선언하면서 학교로 올 것이다.

배움이란 자기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모르고, 그것이 어떤 가치와 의미와 유용성을 갖는지도 말할 수 없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오히려 자기가 무엇을 배우는지 몰라서, 그 가치와 의미와 유용성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배움이 일어나는 동기가 된다.

배움이란, 배우기 전에는 몰랐던 잣대로,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의미나 의의를 측정할 수 있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배우기 시작했을 때와 배우고 있는 도중, 그리고 다 배우고 난 뒤의 배움의 주체는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존재한다. 이것이 배움이라는 과정에 몸을 던진 주체의 운명이다.

그러나 '교육 서비스'를 구입하기 위해 '교육 투자'를 하는 소비주체로 자기를 확립한 아이들에게 이런 배움의 과정은 이해 불가능한 영역일 뿐이다. 소비주체로 배움의 장에 들어선 아이들은 이른바 학교를 편의점과 같은 것으로 여긴다.



변화에 저항하는 아이들


아이들이 교실에서 펼쳐내고 있는 '선생님 말 안 듣기', '수업에 집중하지 않기', '딴짓 하기', '일어나서 돌아다니기' 같은 무질서해 보이는 행동은 일종의 무의식적인 통제의 결과이다.

아이들은 '무질서하게 있을 것'을 거의 제도적으로 강제당하고 있다. "어떤 명령에도 따르지 말라"는 명령에 전력을 다해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안 하기'의 정형을 성실하게 지키기 위해 애쓴다. 아무것도 안 하는 인간으로 보이기 위해 최대한 나른한 표정과 소리를 내고, 교복을 규정과 다르게 입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임을 과시할 수 있는 상징적인 행위들을 텔레비전과 잡지를 보고 열심히 배우고 모방해서 더욱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으로 보이도록 개선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아이들이 온 힘으로 저항하고 있는 대상은 그들을 배움으로 유인해내려는 모종의 흐름과 '성장'으로 나아가게 떠미는 힘이다. 아이들은 시장이 정해놓은 금기사항과 규칙에 복종하면서, 그 흐름과 힘에 전력을 다해 저항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고 있다.


가장 먼저 소비주체로서 세상에 발을 디딘 아이들은 학교에서의 교육서비스 역시 자신의 '불쾌함'을 지불하고 교환해야 할 상품으로 여긴다. 그런데 상품이 상품으로써 가치가 있으려면 소비주체가 그 유용성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배움이란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의미나 의의를 측정할 수 있는 과정이다. 즉 배움은 그 가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미리 시작되는 것이다. 결국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한 배움'은 그 상품가치를 알 수 없으므로 소비주체가 자신의 '불쾌함'을 지불하고 교환할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렇게 아이들은 자신이 그 가치를 알고 있는 아주 극소수의 교육서비스만 받겠다고 선언한다. 그 이상의 배움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등가교환의 원칙에 따라.



리스크 사회의 약자들


세계화와 정보화의 조류 속에서 다양성이 기본이 되는 21세기에는 일본인 각자가 스스로를 확립하고 뚜렷한 개성을 지닐 것이 대전제가 된다. 이때 여기서 요구되는 개인은 무엇보다도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자립해서 스스로를 지키는 개인이다. 자기의 책임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자기가 지향하는 바를 향해 선구적으로 도전하는 '씩씩하면서 유연한 개인'이다.

집단주의에서 자기결정·자기책임으로 전환하는 것을 야마다 마사히로 선생은 그의 저서 [희망 격차사회]에서 '리스크화'와 '양극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리스크화'란 사회의 불확실성이 증가하여 개인의 장래 생활을 예측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아지는 것을 뜻한다. 얼마만큼 노력하면 얼마만큼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노력과 성과의 안정적인 관계가 붕괴하기 시작한 것, 이것이 리스크 사회의 특징이다. 노력과 성과의 상관관계가 불확실하게 되면서 동시에 양극화가 진행된다. 양극화는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은 사람'과 '보상을 받지 못한 사람' 사이에 엄청난 계층 격차가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리스크 사회에서 학력은 그에 걸맞은 일자리를 보증해주지 않는다. 학력에 맞는 직업을 얻은 사람과 얻지 못한 사람 사이에 부당한 격차가 생긴다. 리스크 사회에서는 반드시 양극화가 발생한다. 노력에서 아주 작은 투입의 차이가 성과에서 거대한 산출 차이를 낳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학력의 차이'가 아니라 '학력에 대한 신뢰의 차이'
'노력의 차이'가 아니라 '노력에 대한 동기부여의 차이'



'학력의 차이'는 간단하며 계량이 가능하지만 '학력에 대한 신뢰의 차이'는 '공기'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통계적으로 취급하기 곤란하다. '목표하는 바를 위해 노력하면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것을 온 가족이 믿고 있고, 실제로 그 노력의 성과를 향유하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과 '공부해도 소용없다'라고 공언하고 지금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에 있는 원인이 자신의 노력 부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을 비교하면, '노력에 대한 동기 부여'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리스크 사회에서는 노력과 성과 간의 상관관계가 붕괴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상관관계는 전 사회적으로 균일하게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 계층에서는 아직도 원활하게 기능하는 반면 어느 한 계층에서는 집중적으로 붕괴되고 있다. 즉, 리스크 사회에서 리스크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계층별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가 노력과 성과가 비례하지 않는 리스크 사회이기 때문에 '노력해봤자 소용없다'는 결론을 내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리스크를 떠안는 계층이다.

역설적이게도 리스크 사회에서 생존 경쟁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이 사회가 노력에 반드시 보상이 따르지 않는 리스크 사회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거스르고 의연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역설적이게도 이것에 구애받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사람들이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노력과 성과의 안정적인 관계가 붕괴되기 시작했다고 해서 그 관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관계에 균열이 생겼어도 계속 학습 노력을 기울이는 학생과 노력을 포기하는 학생 사이에는 분명한 학력 차가 발생한다. 게다가 리스크 사회에서는 투입의 근소한 차이가 거대한 산출 차이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결국 노력을 포기한 학생이 가장 많은 리스크를 떠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리스크 사회에서는 리스크를 적게 떠안는 계층과 많이 떠안는 계층이라는 양극화가 발생한다. 그리고 리스크를 적게 안는 사회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매일매일 노력에 대한 보상을 맛보며 더더욱 노력할 동기가 강화되고 리스크를 많이 떠안는 사회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노력의 허무함, 좌절감이 쌓이며 결국 '노력해봤자 소용없다'는 신념이 강화되어 점점 더 노력할 동기를 잃게 된다.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 그 달콤한 열매를 맛본 사람과 맛보지 못한 사람이 어찌 같은 동기부여를 받을 수 있겠는가.



능력주의


노력한 사람은 계층 상승을 이룩하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빈곤층으로 전락한다는 것이 능력주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능력주의가 공정하기 위해서는 '노력하고자 하는 동기'가 만인에게 평등하게 부여되어야 한다. 사회 구성원 전원에게 노력할 동기가 평등하게 주어지고, 그 결과로 차이가 발생했다면, '결과의 불평등'은 공정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보면 능력주의에서 사회적 상승을 도모하기 위한 방편인 '노력하고자 하는 동기'에는 분명히 출신 계층에 따른 차이가 존재한다.

노력하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데 계층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경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일부 사람들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셈이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 이미 이기고 있는 사람이 계속해서 이기는 것을 정당화하는 시스템이 되어버린다.

'누구나 노력하면 같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 능력주의의 전제이다. 그리고 노력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개개인이 주체적으로 결정할 문제이며 그에 따른 결과 또한 개개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 이렇게 능력주의는 자기결정·자기책임의 원칙을 성원에게 들이댄다. 우리가 어떤 사회적 지위에 있고, 어떤 권력과 권위, 재화와 정보와 문화 자본을 향유하고 있는지는 모두 자기가 결정한 개인적인 행위의 귀결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결과를 숙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리스크의 개인화가 진행된다는 말은 동전의 양면으로서 자기결정과 자기책임의 원칙도 함께 침투한다는 뜻이다. 자기가 내린 결정에 의해 리스크를 초래했으므로, 그 리스크는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처리할 것을 요구한다.


위험을 낮추다(hedge risks)


리스크 사회에서 가장 현명한 처신은 가급적 교묘하게 리스크를 헤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리스크 헤지를 어떻게 하는지, 어떠한 자질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우리 사회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지금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실업을 당해도, 노숙자가 되어도, 병이 들어도 모든 것이 이러한 리스크가 있는 삶을 선택한 자신의 책임이라는 말은 리스크란 개인적인 것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왜냐하면 리스크 헤지는 자기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A와 B 중 선택하시오"라고 했을 때, "A와 B 둘 다 선택하겠소"라고 대답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선택하는 주체가 개인인 이상 리스크는 방어할 수 없다.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리스크 헤지를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사람이 필요하다. A를 선택한 사람과 B를 선택한 사람이 있고, 어느 쪽이든 이익과 손실을 균등하게 나누자는 약속이 성립한 경우에만 리스크 헤지가 가능하다. 약속이 잘 지켜진다면 리스크 헤지가 되는 것이지만, '이익과 손실을 균등하게 나눈다'는 약속을 한쪽이 파기하고 '리스크란 개인적인 것'이라고 말해버리면 패자는 리스크를 고스란히 떠안아야만 한다.

리스크 헤지는 '살아남기'를 목표로 집단이 합의한 계획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들은 '살아남는 것을 집단의 목표로 내걸고 상부상조하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뿐이다.

자기가 결정하고 결과도 자신이 책임지라는 말은 리스크 사회가 약자에게 강요하는 삶의 방식(또는 죽음의 방식)이다.


자기결정의 함정에 빠진 약자들


현재 효과적으로 리스크 헤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상부상조하는 집단에 속해 있다. 금테를 두르고 태어난 사람'이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무수한 후원자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에 속해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의 이익은 주로 자기결정을 포기한 대가로 받은 것들이며, 그들이 속한 '강자 연합'이 그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한 그가 무릅쓰는 리스크는 집단 전체가 방어해준다. 이러한 상부상조 조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 일본의 강자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강자들은 리스크 헤지를 위해 풍부한 사회적 관계망을 구축하고 있고 결코 리스크를 떠안지 않는다.

그 반대의 극에는 사회적 약자가 있다. 약자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상부상조 조직에 속할 수 없는 사람이다. 획득한 이익을 공유할 동료가 없고 어려울 때 지원해줄 사람이 없는 사람, 이런 사람이 리스크 사회에서 약자가 된다.

자기결정·자기책임이라는 삶의 방식을 관철할 수 있는 사람은 강자밖에 없다. 하지만 리스크 사회에서 강자들을 살펴보면 다들 상부상조·상호지원 네트워크에 속해 있으며, 그 덕분에 리스크 헤지가 가능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말하면, 리스크 사회에서 자기결정·자기책임을 관철할 수 있는 강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스크를 떠안는 존재는 자기결정·자기책임의 원리에 충실한 약자들뿐이다.

자기결정·자기책임은 벌거벗은 개인으로 고립무원인 사회에 맞서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일본 사회는 '고립된 사람'을 '자립한 사람'으로 부르고 있다. 인간의 고립화는 다양한 병적 형태를 취한다. '공부로부터의 도피'도 초기 증상의 하나이다. 고립된 아이가 혼자서 학교라는 시스템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이것을 왜 배워야 하나요?"라고 질문하며. 스스로 배울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지 못하면 아이는 배움을 거부한다. 이것이 자기결정이다. 배우지 않음으로써 초래되는 리스크를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이렇게 아이들은 계층 하강의 리스크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계층 하강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아이들이 출현


이 이데올로기 교육의 무서운 점은, 이렇게 계층 하강이 자기결정에 대한 자기책임으로 여겨지는 이상 아이들이 여기서 나름의 만족감과 높은 자기평가를 끌어내면서 계층 하강이 더욱 빨라진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단순히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것과 인간의 가치는 관계없다'고 대답하는 데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학교에서 나쁜 성적을 받는 것이 오히려 인간의 가치를 높인다'라고 하는 반 학교적인 사고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 갖기, 즉 '자기 존중'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주창해온 교육 이념의 하나다. 그런데 아이들이 자신감을 갖는 경우는 그들이 속하는 사회집단에서 지배적인 가치관에 동조될 때다. 반대로 말하면 그가 속한 사회집단의 가치관과 행동준칙에 맞추지 못하면 자신감을 갖기가 어렵다.

계층화란 단순히 사회 계층 간의 권력과 재화, 정보의 분배 차이에 그치지 않고 사회계층별 가치관과 행동규범의 차이이기도 하다. 계층이 폐쇄적이면 내부 평가를 통해서만 자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소속 계층의 이데올로기를 한층 더 농축시켜 체현한다. 이렇게 하여 짧은 시간에 계층은 급속도로 더욱 폐쇄적으로 변한다.

'개인=자기 존중'을 원칙으로 하는 개인주의,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자신에게 좋은 감정 갖기'를 중시하는 교육은 '계급에 뿌리를 둔 사회의 본질'과 모순된다.


자기결정·자기책임·자기 존중의 이데올로기를 덧입은 아이들.

이들은 자기가 속한 계층의 가치관과 행동규범에 동조함으로써 자신감을 얻고 이로써 자기 존중을 실현한다. 그런데 이는 자기 결정주의와 모순된다. 자기다운 삶을 찾아서 사회의 상식을 거스르고 당당히 '자기다움'을 실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말투, 복장 그리고 가치관이 정형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의 '자기다움'이란 실은 그들이 속한 계급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기에게 좋은 감정 갖기'와 같은 교육 이념을 강조할수록 각 계층들은 그들만의 자기다움을 강화하며 더욱 폐쇄적으로 변하고 결국 계층 간의 격차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개인으로 하여금 계급화된 사회구조의 규칙성에 일상적으로 따르게 하는 이데올로기의 작용'이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학력저하는 노력의 결과다


오늘날의 교육 문제는 단순히 아이들의 학력이 떨어지는 데 있지 않다. 근본 문제는 이것이 아이들이 나태해서 초래된 결과가 아니라 노력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사회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이는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노동으로부터 도피하기


자율이 강제되는 부조리


일본인들은 철저하게 집단 지향적이기 때문에 '자기결정을 하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모두가' 공유하자고 소리 높여 요구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에는 분명 모순이 있다.

일본인이 말하는 자기 결정론은 '자기결정은 좋은 일'이라는 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정부 주도로 형성되고 있고,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 의견은 묵살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도착적이다.

"모두가 자기결정을 하는 시대이니 너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결정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을 보통의 지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알아챌 텐데 아이들은 깨닫지 못한다. 선택을 강제하면서 선택한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것을 강요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조리하다. 하지만 아이들은 특별히 부조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부조리가 현실에 있고, 일정 정도 이상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으면 그것은 더 이상 부조리로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다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일본형 니트는 이런 맥락에서 태어난 사회집단이라고 생각한다.


일본형 니트족

일본형 니트는 이러한 '자기결정'을 하는 젊은이들이 보이고 있는 하나의 병리현상으로 고찰해야 한다.

일본에서는 사회적 약자가 자진해서 차별적인 사회구조를 강화하는데 가담하는 방법으로 계층화가 진행되고 있다. 다시 말해 약자가 자신의 사회적 입장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세계에서도 예외에 속하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의사로 지식과 기술 익히기를 거부하고 계층 하강하는 아이들이 출현했다는 사실은 아마도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일 것이다.

'교육받을 권리'를 수익자인 당사자들이 자진해서 포기하고 있다. 이것은 교육을 받는 것이 '특권'이 아니라 '고역'으로 느끼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 아이들에게 교육을 받는 것이 '권리'인지 '의무'인지를 묻는다면 아마 90퍼센트의 아이들이 '의무'라고 답할 것이다. 이 대답에는 교육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강제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배움'이란 본시 아이들이 먼저 나서서 '침해할 수 없는 권리'로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것을 고역으로 여기게 되었을까? 배움으로부터의 도피가 어째서 일종의 성취감이나 자기만족을 가져오고, 이런 도착적인 감수성이 왜 1990년대 이후의 일본 사회에서 형성되고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내 나름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교육의 '권리'를 '의무'로 바꿔서 읽는 도착 행위가 일어난 이유는 경제적 합리성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침투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성숙의 최초 단계에서 자신을 '소비주체'로 내세우게 된 일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단순히 생활이 풍족해졌다거나 물질적 욕망이 커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의 문제로, 아이들이 '시간'과 '변화'에 대해 스스로를 가두듯이 어릴 적에 자기형성을 이미 완료해버렸기 때문이다.

니트의 발생은 노동의 본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하고 있다. 니트족은 '노동하는 것' 그 자체에 불합리함을 느껴 노동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므로, 왜 그들이 불합리함을 느끼는지 근본 문제를 간과하는 한 어떤 정책도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악화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노동으로부터 도피하는 젊은이들의 가슴 밑바닥에는 소비주체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들은 소비행동의 원리를 노동에 대입시키고, 자신이 제공한 노동에 대해 임금이 적거나 충분한 사회적 위신을 획득할 수 없으면 "이건 좀 이상해"라고 말한다. 물론 등가교환을 원칙으로 한 경우라면 그들이 하는 말은 전적으로 맞다.

젊은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경제적 합리성은 요컨대 '노력과 성과의 상관'이다. 그런데 노동 현장에서는 아무리 봐도 노력과 성과가 상관관계가 아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고 또 그들의 생각이 맞다. 실제로 노력과 성과가 함께 가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불합리한 일은 못하겠어요"라고 당당하게 주장한다. 정말 합리적이다. 이것은 '공부로부터의 도피'의 경우와 같은 논리다.

니트 문제의 최대 난관은, 니트족이 어렸을 때부터 쭉 경제적 합리성을 가지고 가치판단을 해왔고 그 결과 스스로 무직자의 길을 선택했다는 그들 나름의 수미일관성을 경제적 합리성이라는 논거로 깨뜨릴 수 없다는 데 있다.

니트들은 등가가 아닌 교환에는 결코 응하지 않는 '영리한 소비주체'로 자기들을 규정하고, 여기서 비록 작으나마 만족감과 성취감을 얻고 있다. 이 상태를 고수하는 이상, 그들이 '공부'나 '노동'과 같은 본래 등가교환이 아닌 역동적인 과정 속으로 들어가기로 자발적으로 결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니트에게 "넌 일을 해야 해"라고 말하면 그들은 지체 없이 "왜요? 그게 나한테 무슨 이득이 되는데요?"라며 반문할 것이다. 그들의 가치판단 기준에 비추어 '유용하다'고 판단하면, "그렇다면 일을 해보지요"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유용 무용'을 판단할 때, 배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재화나 본능적 즐거움 또는 사회적 위신 같은 '어린아이도 아는 가치'를 노동과 등가교환을 하여 얻을 수 있다는 확증이 있는 경우라야만 일할 것을 수락한다. 확증이 없으면 결코 응하지 않는다.


임금은 언제나 내 기대보다 낮다


배움이란 시간적인 현상이므로 소비주체로서 자기를 형성한 아이들에게는 배움의 동기 자체가 없다. 노동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노동 주체와 소비주체의 차이는, 노동 주체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승인을 받을 때까지 스스로의 주체성을 확인할 수 없는 반면, 소비주체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승인을 받기에 앞서 화폐를 손에 쥔 시점에 이미 주체성을 확보했다는 점에 있다.

소비주체의 경우, 화폐의 제시와 상품 교부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화폐와 상품의 등가교환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을 포함하는 시스템이 변화하지는 않는다. 변화할 필요가 없고 변화해서도 안 된다. 모든 것이 '그 자리'에서 끝난다. 이에 반해, 소비 행동은 본질적으로 무시간적인 행위이다. 우리는 대가의 제시와 상품 교부 사이에 시간차가 있는 것을 잘 참지 못한다. 돈을 지불했는데 상품을 받지 못하면 매우 불안해한다. 일반적인 소비행동에서 화폐와 상품의 교환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지불 즉시 인도가 등가교환의 원칙이다. 고도 소비사회에서는 이보다 한술 더 떠 돈을 지불하기도 전에 상품을 인도하는 시스템이 지배적인 형태로 떠오르고 있다.

교육을 소비행동의 도식으로 받아들이는 아이들이 '공부로부터 도피'하는 길로 나아가듯이, 노동을 소비행동의 도식으로 받아들이는 청년들이 '노동으로부터 도피'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은 시간을 계산에 넣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임금은 원리상 항상 부당하게 낮게 인식된다. 임금은 아무리 봐도 등가교환이 아니다. 왜냐하면 회사와 고객에게 제공한 '고역'에 대해 '등가의 보수'가 '동시적'으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을 한다'는 것은 소비 용어로 말하면 모든 노동자는 부당한 교환을 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노동에의 가치에 비해 임금이 낮은 것은 원리상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임금이란 노동자가 창출한 노동가치에 비해 항상 적다. 당연하다. 그렇지 않다면 기업이 이윤을 낼 수가 없고, 주주에게 배당도 할 수 없으며 설비투자도 불가능하고, 연구개발도 할 수 없다. 경제활동에 들어가는 자금은 모두 노동자로부터 '수탈'한 노동가치에서 조달된다. 노동자가 자신이 창출한 노동가치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경제의 기본 원리다. 여기서 발생한 잉여가 교환을 가속시키고, 그 결과 시장이 형성되고 분업이 이루어지며 계급과 국가가 생겨난다. 인간은 이런 방식으로 사회를 만들어왔다.

노동이란 본질적으로 과잉 획득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항상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이 만들어낸다. 더 만들어낸 부분은 이른바 개인이 공동체에게 바치는 선물이다.


반드시 되돌려줘야 하는 것
이 있다

노동 주체가 창출한 가치의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증여해야 하는 이유는 노동 주체로 나섰을 때 이미 타인으로부터 증여를 받았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채무자'인 것이다. 그래서 그 '채무'를 청산해야 한다는 이 원죄의식이 과잉 획득의 의무감을 갖게 한다. 이것이 '노동의 인류학'이다.

월급쟁이의 노동도 인간이 하는 활동이기에 교환의 기본 규칙에 따라야 한다. 모든 인간사회가 '일할 의무'를 기본 윤리로 삼아왔던 이유는 우리들의 모든 사회생활이 '일을 함으로써 이미 수취한 물건을 되돌려줘야 하는' 반대급부의 의무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 의무감과 채무감을 제쳐놓고 일에 동기를 부여할 수는 없다.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노동을 포장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노동의 본질이다.



공부로부터의 도피, 노동으로부터의 도피는
자신의 무지에 고착하는 욕망이다


교육을 '고역과 성과', '화폐와 상품'. '투자와 회수'라는 비즈니스 모델로 바라보는 한 교육은 반드시 무시간 모델로 밑그림을 그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소비주체는 시간 안에서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변화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는 화폐를 투자해서 이와 등가의 상품을 손에 넣는 교환을 반복하는 한 보유하고 있는 자산의 형태는 변하지만 총액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등가교환 제도 안에서 살아가는, 변화하고 성숙하는 것을 금지당하고 있는 소비주체의 숙명이다.


아이들은 맨 처음 소비주체로서 삶에 입장하여 자기결정·자기책임·자기 존중이란 이데올로기와 만난다.

자신이 속한 계급 안에서 인정받아야 자기 존중을 이룰 수 있기에 더욱 자기 계층의 가치를 덧입기로 자기결정 아닌 자기결정을 내리는 아이들. 삶에 소비주체로 들어선 이상 시간성을 무시한 등가교환의 원칙에 빠지게 되고 더 이상의 배움, 성장을 거부한 채 자신의 무지에 고착되고 만다. 이로서 그들은 스스로 사회적 약자, 고립된 개인이 되길 자초하며 가장 많은 리스크를 떠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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