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울 뒤피 회고전 '색채의 선율' 리뷰
처음 라울 뒤피의 그림을 본 날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어느 전시회에서였고, 뒤피의 개인전은 아니었다. 그냥 스쳐지나가려던 그림 앞에서 동생이 오래 머무르기에 나도 함께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동생은 꼭 그리다 만 것 같은 뒤피의 선을 가리키면서, 저렇게 휙휙 그릴 수 있는 용기가 부럽다고 말했다. "대단한 것 같아. 내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릴 수 있는 용기가 나한테는 없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즐거워." 동생의 말처럼 뒤피의 그림은 산뜻하고 경쾌했다.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화면이 가볍게 들썩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라울 뒤피는 용기 있는 예술가였다. 그 시절 미술계를 주름잡았던 야수파와 입체파의 영향을 두루 받았지만(강렬하고 이질적인 색의 결합에선 야수파적 면모가, 입방체로 그린 원경의 건물들에선 입체파적 면모가 두드러진다.), 그는 그들의 스타일을 그저 흡수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기만의 실험을 계속해 나갔다. 가령 뒤피 그림의 가장 큰 매력은 윤곽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선은 누구의 것과도 같지 않다. 뒤피의 선은 빠르고 속도감이 넘치며 좀처럼 후퇴를 모른다. 그래서 그가 선을 자유롭게 그릴 수 있게 되기까지 수십 수백 번 연습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게 만든다. 바다 위 반짝이는 물결이나 공원의 나무를 보면 선들은 날아갈 듯 가벼워서, 꼭 붓끝으로 그린 휘파람 같다. 붓이 지나간 자리마다 음표들이 태어난다.
색을 쓰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트루아 미술관 관장인 에릭 블랑슈고르주에 따르면 뒤피는 1920년대부터 색과 형태를 분리시키는 작업을 시도했는데, 그것은 형태와 색을 일대일로 대응시키지 않는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하나의 형태에 하나의 색을 두지 않았"다. 사물의 테두리를 분방하게 넘나드는(경계선 따위는 가뿐하게 무시하는!) 색채를 보고 있으면 이 화가의 대담함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음악을 그림으로 형상화한 최초의 사람은 칸딘스키라지만, 뒤피를 만난 이래 내게 뒤피만큼 음악적인 화가는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구상보다는 늘 추상에 이끌리고, 칸딘스키가 위대한 화가라는 사실 역시 한 번도 의심해 본 일이 없지만, 그가 화폭에 부려 놓은 곡과 사랑에 빠진 적은 없다. 물론 칸딘스키도 그걸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칸딘스키와 달리 뒤피는 '음악을 그리겠다'고 작심한 적 없는 듯하나 그의 그림 곳곳에서 튀어오르는 것은 분명코 음악이다. 작업을 하는 동안 모차르트의 곡을 자주 들었기 때문일까?
그러고 보면 뒤피와 모차르트 사이에는 모종의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인생의 기쁜 측면을 주로 보여주고자 했다는 것. 삶의 환상과 순수가 그들 작업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 그러나 그 기저엔 알 수 없는 슬픔이 깔려 있다는 것까지.
실은 오랜만에 전시장에서 뒤피 그림을 무더기로 마주하고 나는 살짝 눈물이 날 뻔했다. 몇 작품에 시선을 꽂자 그림이 즉각 내 안으로 들어와 일하기 시작했다. 몸속에서 빠르게 퍼지는 활성 비타민처럼. 나는 괜스레 욕심이 나서 그 와글거리는 기운을 더 의욕적으로 빨아들였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어쩐 일인지 울고 싶어졌다. 삶의 지리멸렬 속에서도 기어이 희망을 그리고자 했던, 스스로가 구축한 세계에만큼은 걱정과 우울을 들여놓지 않으려 했던 화가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내 눈은 추한 것을 제거하기 위해 있다"고 말했던 사람. 그는 자기가 소망하는 세계를 그림으로써 세상에 맞섰을 것이다. 어쩌면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아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