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한 워킹맘의 발칙한 상상
일요일 오후, 딸아이가 다가와 두통을 호소했다. 그저께부터 컨디션이 안 좋더라니. 올 것이 왔다.
감기.
8살, 이맘때까지 아이들은 주기적으로 아프다. 요새 좀 안 아프다 싶더니 영락없이 아프다. 조금 더 자라면 덜 아플 텐데, 아직 덜 자랐다는 증거일까. 기운이 쏙 빠져 창백한 아이의 얼굴을 보니 가엾기 그지없다. 얼마나 보대꼈으면 저럴까. 아휴.
아이가 열이 난다고 하니 주위에서 다들 “요즘 감기가 유행이래.”라고 말했다.
글쎄, 감기가 유행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니. 때마다 철마다, 갖가지 이름이 붙은 종류도 다양한 감기들.
워킹맘인 나에게 아이의 감기는 시냅스와 뉴런을 바삐 움직이게 하는 초강력 무기다.
일단 아이가 아프다는 신호가 감지되면 뇌는 아래와 같은 정보를 바쁘게 떠올리기 시작한다.
_내일 회사에서 내가 반드시 할 일이 있는가
_남은 연차는 몇 개인가. (혹은 반드시 남겨야 할 연차는 몇 개인가)
_가까운 시일 내에 쓰기로 연차가 있는가 (너무 자주 연차를 쓰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되므로)
_아이를 맡아 줄 가능성이 있는 사람, 엄마 vs 시어머님
_우리 집, 특히 냉장고 안이 깨끗한가(만약 시어머님이 집에 와서 아이를 돌봐주셔야 할 가능성을 떠올리며)
_출근 전 대기 없이 병원진료를 받으려면 집에서 몇 시에 나서야 하는가
_내일 빠지게 될 학교와 학원 (아이가 아파 오늘 결석합니다 메시지도 함께)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각한다.
‘오늘 잠 다 잤군.’
해열제를 먹고 누워있는 아이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나는 지금 휴직 중이고, 사실상 백수이기 때문에 내일 아이를 돌보는 일보다 중요한 어떤 일정도 없다. 아이가 아프다는 신호에 뇌가 반응할 것이 없다. 그저 만세를 외쳤다. 내일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아도 되겠군. 집에서 내가 보살피면 되잖아. 환희의 송가라도 부를 참이다. 기뻤다. 아.. 정말,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어쩐지 결석을 해도 학습결손이 크지 않을 것 같고, 아이는 늦잠을 자고 일어나더라도 병원접수 후 집에 가서 느긋하게 한 시간쯤 기다려도 될 듯하다. 아이들 감기쯤이야 집에서 잘 먹고 푹 쉬면 낫는 병 아니겠어?
아이가 아픈데 한편으론 기분이 좋았다. 내가 휴직중일 때 아파줘서 고맙기까지 했다. 혹시 앞으로 아플 거 지금 다 몰아서 아파주면 안 될까. 그럼 복직해서 엄마가 덜 힘들고, 덜 미안할 것 같은데.
물론 딱 감기정도만, 집에서 쉬기만 해도 낫는 그만큼만 아파주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