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후련하네

엄마가 해야 할 말의 총량

by 새이버링

육아휴직을 했다. 둘째가 등교를 하고 나서 하교를 할 때까지 나에게 약 다섯 시간의 자유가 생겼다. 평소에 미루던 티 안나는 일들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버리기 아까운 책들을 알라딘 중고서점에 판매하자. 굉장히 귀찮고 수고비도 안 나오는 일이란 것 잘 안다. 그래도 서점에 갈 핑계가 생겼으니 좋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심심하다고 했다. 회사에 다닐 때 같으면 이런 전화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집에 있을 것을 뻔히 알고서 전화를 한 것이다. 사실 오늘 아주 바쁜 것은 아니지만 나름 할 일을 머릿속에 그려둔 상황이다. 나 바쁜데,라고 말하려다 말을 조금 돌렸다.


"그럼, 나 어디 가는데 따라올래?

"어딘데?"

"서점 갈 건데, 상무지구."

"그래, 좋아!"


엄마도 오늘 어지간히 심심한 날인가 보다. 나는 엄마 집 앞으로 엄마를 모시러 갔다. 차려입고 나온 엄마는 조수석에 앉아 밝고 순순한 표정을 지었다. 같이 드라이브를 하고 점심도 먹을 생각에 약간 설렌 눈치다.


"어제 네 아빠 때문에 짜증이 나서 혼났다."


이 말로 시작한 엄마의 수다는 속사포처럼 터져 나왔다. 핸들을 돌리고, 깜빡이를 넣으며 나는 엄마의 말을 들었다.


"아, 진짜?"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아, 그럴 수도 있겠다."


몇 개의 리액션을 번갈아가며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새 책방에 도착했고 나는 팔 책을 끙끙대며 서점으로 옮겼다. 엄마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몇 푼이나 받는다고 이 짓을 해? 하는 표정이다. 서점에서 나올 때 나는 약간의 잔소리를 감내해야 했다. 챙겨간 책의 절반도 팔지 못했다. 책에 결함이 좀 있거나 부속품이 누락된 경우, 판매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미처 찾아내지 못한 결함 때문에 절반은 버리고 왔다. 그리고 내가 책을 팔아 받은 돈이 고작 이만 사천 원 밖에 안 되었기 때문이다.


"쯧쯧.. 고작 이 돈 받으려고 기름 닳히고 여기까지 온 거야? 너도 참 할 일 없다."

"왜.. 그냥 버리면 쓰레기지만 이렇게 팔았으니 누군가는 읽을 거 아냐?"


엄마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도 하다. 다시 시동을 걸었고 엄마는 조수석에 앉았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또 여러 가지 볼 일을 봤다. 나온 김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동안, 엄마는 쉬지 않고 엄마의 이야기를 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엄마에게 삐진 친구 이야기, 아빠 이야기, 병원 이야기, 약 이야기, 언니 이야기, 오빠 이야기, 손자 이야기 등등..


마치 오늘 엄마가 해야 하는 말의 총량이 정해진 사람처럼.


그렇게 쉼 없이 내게 말하는 동안 나는 핸들을 돌리고 액셀을 밟으며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말도 안 되게 이기적인 엄마의 생각과 오해를 들으며 나는 한 번도 반기를 들지 않았다. 대신 이런 리액션으로 엄마의 수다를 거들었다.


"엄마 생각은 어떤데?"

"엄마는 그렇게 생각했구나.."

"엄마 정말 대단한데?"

"엄마 말이 맞지!"


이렇게 대꾸하면 엄마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쉴 새 없이 말한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나의 자유 시간이 바닥을 드러냈다. 신데렐라의 시계 마냥, 둘 만의 시간이 막을 내렸다. 이제 엄마 집 앞에 다 왔다. 아파트 입구가 보일 때 까지도 엄마는 쉴 새 없이 말했다. 엄마가 내리기 좋은 곳에 차를 주차했다. 엄마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휴, 너한테라도 하고 싶은 말 다해서 시원하다. 잘 가!"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지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말들을 하지 못해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엄마가 해야 할 말의 총량을 오늘 다 채웠을까? 마음속에 쌓였던 스트레스와 응어리들을 내 차에 다 쏟아냈기를. 그래서 정말 가벼운 마음이 되었기를 간절히 바라며 차 안의 탁한 공기를 내보내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낼 때까지 다섯 시간 동안 묵묵히 엄마를 견딘 나 자신이 대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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