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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도둑

이런 식으로 도둑맞은 시간은 되찾을 방법이 없다.

by 새이버링


어느 날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 한 통.


”저는 신한은행 OO대학교 지점장입니다. 내일 교직원 분들께 소개드릴 좋은 상품이 있어서 방문하고 싶은데 시간이 괜찮으신지요.”


잠깐 멈칫했지만 대학의 주거래 은행 지점장님이 직접 팀에 전화를 걸 정도라면 수락하는 게 도리라는 생각이 들어

“네, 내일 3시경에 시간이 날 것 같습니다.“

라고 친절하게 답했다. 티끌만 한 불편함이 눈앞에 번쩍했으나 수화기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파리 몰듯 치워버리고 마침내 오늘 세 시가 되었다.


훤칠한 젊은 남자가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게 사무실로 걸어 들어온다. 그는 대뜸 팀장을 찾는다. “전데요.” 라고 말하며, 방문을 예약한 낯선 이를 회의 탁자로 안내했다. 다급히 노트북을 꺼내며 뭔가를 설명하려는 그에게 신한은행에서 오셨냐 물었다.

“은행 창구에서 금융상품을 파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서 제가 이렇게 직접 온 것입니다. 저는 신한은행 직원은 아니고요, 상품 판매를 위탁받은 사람입니다.”

“아...네...”


당황한 기색을 안간힘을 써 참았다. 빳빳한 그의 셔츠와 당당한 기세에 눌렸다. 하필 날도 더운데 자켓까지 입었군. 휴.

이쯤 되면 명함 하나쯤 내놓을 만도 한데, 노트북에 슬라이드 하나만 덩그러니 띄운다. 팸플릿은 없냐고 물었다.

“이게 특별히 선생님들께만 제공하는 혜택이어서 직접 설명을 드려야 합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 계속 이어진다. 어제는 티끌만 했던 불편함이 사과 한 알만큼 커져서 내 명치를 꾸욱 누른다. 그는 마침 함께 앉아있던 직원과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xxxxx에 대해 당연히 알고 계시죠?”

“아직 이걸 모르신다면 큰일납니다.”

“XXX과 RRR중에서 뭐가 더 이득이겠습니까?”


속사포처럼 질문을 던지는 이 사람은 대답이 없는 나를 빤히 본다. 그의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없는데? 어째서 이 사람은 자꾸 질문을 하는가. 시간은 자꾸 흐르고 그는 쉬지 않고 말했다. 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귀를 닫았다. 연간 매출액이 40조가 넘는 신한은행에서 판매하는 특판상품이라고 하기에는 PT가 허접했기 때문이다. 라이나생명, 동양종금.... 신한은행과는 달만큼 거리가 먼 회사들을 읊조리다가 결국 준비한 대본을 다 쏟아낸 그는 숙제를 마친 게으른 고딩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쯤 되니 이런 생각이 찾아왔다.

‘타인의 시간을 뺏는 게 이 사람의 노동이구나. 이 노동의 대가는 얼마일까?‘


시간의 가치를 돈보다 우선하는 나인데, 벌써 30분 이상의 금은보화를 낯선 이에게 도둑맞은 이상 더 이상의 출혈은 허락할 수 없었다.


“좋은 상품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제가 고민을 좀 해보고 연락드릴게요. 명함 있으면 주시겠어요?”


그는 나의 다정한 거절에 예상했다는 듯 일침을 놓았다.

“명함을 드려도 다시 연락 주시는 분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명함을 드리지 않습니다. 워런버핏은 저축은 빠르게 결정하고 투자는 신중하라고 했습니다.“ (워런버핏이 진짜 이 말을 했는지 찾아봤지만 비슷한 말도 없더라. 낚였군.)


나는 명언까지 들먹이는 그를 보며 억지로 웃었다. 이 상황에서 필요한 친절은 얼만큼일까? 주차권이 필요하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시간을 도둑맞은 것으로 손해는 충분했다. 내일 신한은행 지점장을 찾아가야 하나, 노조위원장님께 전화를 걸어서 신한은행 지점장을 사칭한 예금상품 특판이 횡행 중이라고 고발해야 하나,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그는 방문객에게 제공한 시원한 비타500을 가방에 챙기고는 ”잘 마시겠습니다. “ 말하며 유유히 사무실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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