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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달 april moon Dec 16. 2019

유럽사의 단면도

존 허스트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 | 위즈덤 하우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를 논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일은 제목을 바로 잡는 것이다. 원제는 <The Shortest History of Europe 세상에서 가장 짧은 유럽사>. 한국에서 ‘유럽사’가 ‘세계사’로 둔갑한 것은 출판사의 의도적 오역으로 유럽사에 거리가 먼 한국인에게 이 책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출판사의 꼼수는 제대로 적중했을지도. 나 역시 이 책의 제목을 ‘유럽사’로 알았다면 크게 관심을 가지지 못했을 테니까. 곡절이야 어떻든 책을 모두 읽고 서평을 써야 하는 지금, 아래부터는 책 내용을 언급할 때 유럽사 혹은 서양사로 바로잡아 지칭하려 한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역사는 인류가 쌓은 시간의 층이다. 퇴적된 시간을 통해 우리는 과거를 확인하고, 현재를 직시하며,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대중에게 역사란 너무 방대한 탓에 손대기 싫은 골치 아픈 숙제로 여겨지기 일쑤다.

나에게도 역사는 재밌지만 까다로운 분야다. 그 중에서도 서양사는 한국사나 동양사보다 훨씬 접근하기 어려웠다. 전혀 다른 문화권의 이야기다 보니 온갖 간접 경험과 배경지식, 상상력까지 동원해야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서양사에 등장하는 인물명이나 지명에 취약한 나머지 학창시절 세계사 교과서는 늘 뒷전이었다. 때문에 서양사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리기에 음악, 영화, 건축 등 다른 길로 돌고 돌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상상했다. 중학교 시절에 이 책이 나왔더라면? 우리 집에 하숙하던 대학생 언니가 “앞으로는 서양사에 힘 빼지 말고 이걸 봐.”라며 이 책을 무심코 던져주었다면? 그랬다면 서양사에 대한 첫 인상이 좀 달라졌을까?


유럽사 단숨 정리, 보다 꼼꼼한 유럽사, 세계적인 사건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유럽의 2000년 역사를 간결하게 정리했다고 홍보됐다. 그리고 몇몇 유명인사들의 추천으로 베스트셀러 코너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완독이 쉽지 않았지만 나름 호기롭게 한 줄 평을 남기자면 <그리스·로마부터 유럽연합까지 유럽사의 단면도>라 하겠다.

지질학에서 중요한 지층의 단면도를 떠올려보자. 그것은 지질의 연대기와 형성 과정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하지만 지질 역사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지층 단면 외에도 판형의 변화, 물리적·화학적 영향, 암석과 광물의 속성, 고생물의 종류와 특징 등이 포함된다.

이 책은 고대의 품위와 지혜, 중세의 소용돌이, 그리고 역동적인 근대국가 형성 과정을 짧은 호흡으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단면도 같다. 그것이 이 책의 극강점이다. 다만 가장 짧게 유럽사를 정리하겠다는 취지에서 발생한 불가피한 생략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특히 20세기 이전의 침략, 전쟁, 식민지 등 다양한 갈등을 극적으로 다루지 않은 점에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그 갈등이야 말로 인류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반성의 대목이자, 인류의 다채로움을 이끌어낸 원동력일 텐데 말이다.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분명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1부의 압축력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랍다. 또한 훨씬 앞선 문명을 가진 중국을 제치고 유럽이 세계를 재패한 이유와 현재 세계적인 국가 운영 기틀이 마련된 과정의 요약까지도 꽤 성공적이다.

작가가 언급한 유럽 역사의 특징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라틴어에 대한 부분이다. “라틴어는 오늘날 지구상의 어떤 영토에서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종종 죽은 언어로 묘사되는데 만약 그렇다면 라틴어는 흔치 않는 ‘살아있는 송장’이다.” (175쪽) ‘살아있는 송장’에서 포인트는 ‘살아있다’에 있다. 그것은 유럽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라틴어는 유럽 전역의 교육받은 남성들을 이어 주는 강력한 접착제였다. 라틴어는 그들에게 제2의 공용어, 사회적 유대 그리고 그들이 빠져들 수 있는 일종의 암호를 제공해주었다.” (189쪽) 유럽의 각 국가들이 다른 입장의 흥망성쇠를 겪어내고도 현재 유럽연합으로 세계 재패에 다시 도전하고 있는 것은 라틴어라는 지주가 있었기 때문인가...라는 생각까지 뻗어나간다.


자, 이제 서두의 자문을 다시 던져보겠다. 과연 이 책을 먼저 알았더라면 서양사와의 친밀도가 더 높아졌을까? 대답은 ‘아니오’다. 분명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란 제목은 대단히 유혹적이다. 하지만 압축과 요약은 요점 정리 혹은 복습에 유용한 방법이 아니던가. 만일 당신이 <십자군 전쟁>이나 <백년 전쟁>이 뭔지 모른다면? 이 책을 다 읽었다 하더라도 곧 뇌리에서 잊히게 될 가능성이 크다. 만약 당신이 <해가지지 않는 나라> 혹은 <철의 장막>을 처음 듣는다면? ‘이보다 더 자세할 순 없다’를 내세우는 서양사 전집을 옆에 끼고 사전을 찾는 듯한 수고를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그렇다. 당신이 서양사에 입문한 상황이라면, 그리고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가능한 꼼꼼히 서양사 탐독을 마친 후 이 책을 마주하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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