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월달 april moon Dec 11. 2019

'눈'의 찬미

막상스 페르민 |『눈』|  난다

이 책은 지난 4월 고급스러운 비누와 양초의 향을 머금고 내 손에 닿았다. (프랑스에서 1999년 출간되었는데 우리나라에 지난 2월 번역되어 나왔다.) 다른 지역에 살다보니 자주 볼 수 없는 26년 지기 친구가 생일선물로 보내온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껏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눈을 사랑하는지라 책을 마주하는 순간 애정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표지를 넘긴 순간 나타난 글귀.

「백색만 보입니다 – 아르튀르 랭보」

심장이 두근거렸다. 랭보에 심취했던 우리의 학창시절이 영화처럼 떠올랐다. 실은 『토탈 이클립스』라는 영화를 통해 기괴하고 반항적인 그의 삶에 매료됐던 게 먼저였을 것이다. 랭보는 10대에 시를 썼다지만 10대의 우리가 그의 시를 이해하기란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아무튼 서문을 대신한 그 한 줄의 글귀로 친구와의 추억여행을 떠날 준비를 마치고 한 글자 한 글자를 꼭꼭 씹어 갔다.



“아버지, 저는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승려의 미간이 깊은 실망을 나타내며 찌푸려졌다. 태양이 물결무늬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개복치 한 마리가 자작나무들 사이를 지나 나무다리 아래에서 사라졌다.
“시는 직업이 아니야. 시간을 흘려보내는 거지. 한 편의 시는 한 편의 흘러가는 물이다. 이 강물처럼 말이야.”
유코는 고요하게 흘러 사라지는 강을 깊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아버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것이 제가 하고 싶은 겁니다. 시간의 흐름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10~11쪽)


『눈』이라는 제목은 아주 직관적이다. 순백의 눈을 찬양하는 하이쿠 시인 유코. 그는 17살에  눈에 매료됐고, 눈을 17자의 시(하이쿠)라고 여겼으며, 눈 위에서 곡예사를 사랑한 스승을 만났고, 눈 속에서 예술에 눈 떴다. 그리고 운명적인 사랑까지 얻었다. 단순한 서사와 뻔한 결말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답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배경에 있다. 젊은 하이쿠 시인이 눈처럼 하얗기만한 자신의 시에 색을 불어 넣기까지 온통 눈으로 눈부시다. 깨끗하고 눈부신, 차갑고 혹독한... 눈이 가진 모든 속성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아름다움으로 점철된다.

또 다른 이유는 작가가 취한 글의 형식에 있다. 약 1~3쪽 내외로 마무리되는 54개의 단락은 하이쿠의 간결함을 표방하는 시와 같다. (실제로 일본의 유명 하이쿠 시인의 시가 실려 있기도 하다.) 그 시들이 모여 중편 소설을 이루는 것이 흥미롭다. 짧은 호흡이 주는 강렬함이 시와 소설의 중간쯤에 놓인 이 작품을 더욱 미화시킨다.


눈은 한 편의 시다. 구름에서 떨어져내리는 가벼운 백색송이들로 이루어진 시.
하늘의 입에서,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시이다.

그 시는 이름이 있다. 눈부신 흰빛의 이름.

눈. (8~9쪽)


작가 <막상스 페르민>은 프랑스 알베르빌 태생이고 그 근방에서 자랐다고 한다. 중학교 때 대전 엑스포에 가서 (그러고 보니 그곳에서도 친구와 함께였다!) 알베르빌 동계 올림픽 홍보관을 둘러보고 가져온 엽서를 오래도록 보관했던 게 생각났다. 눈이 많은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라면 당연히 이런 글을 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다만 어째서 장소적 배경은 일본이었을지, 왜 소재는 하이쿠였을지 의문을 남긴다.)


“눈은 하얗지요. 그래서 시인겁니다. 순수한 시예요.
눈은 자연을 얼려서 보존하지요. 그러니 눈은 그림입니다. 겨울의 가장 섬세한 그림입니다.
눈은 계속 변하지요. 그래서 눈은 서예입니다. ‘설雪’ 자를 쓰는 만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눈의 표면은 미끄럽지요. 그래서 눈은 춤입니다. 눈 위에서는 누구나 곡예사라고 생각할 겁니다.
눈은 물이 되지요. 그래서 눈은 음악입니다. 봄이 오면 눈은 강들과 급류들을 하얀 음표들의 교향악으로 바꿉니다.“

“그것뿐이냐?” 승려가 물었다.
“눈이 보여주는 것은 훨씬 더 많습니다.” (21~22쪽)


단숨에 책을 읽고 나니 한 여름, 새벽이다. 그런 나도 서늘한 눈밭에 서 있는 느낌이다. 내가 지나온 발자국도 끝이 보이지 않는 그 혹한에, 하얀 입김을 뿜으며 두리번거리는 내 눈동자에 하얀 구름이 어려 있다. 부디 나도 찾아 헤맨 것에 도달할 수 있길 바라며... 진짜 겨울을 기다려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차르트의 시공간 속에서 만난, 인간 '모차르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