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르완느 Dec 02. 2024

친절한 퇴고 작업

작가처럼 보지 못한 타인을 배려하는 이가 있을까? 작가만큼은 독자를 위해 가독성이라는 친절함을 글에 녹여야 하는 걸까? 글을 잘 쓴다는 건 결국은 타인을 배려하는 글 쓰기인 걸까? 목적이 있는 글쓰기와 읽는 이를 고려한 글쓰기는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나를 위한 글쓰기로 시작하지만 결국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은 타인을 위한 글쓰기로 향한다. 수많은 독자의 계층 중 ‘나와 동질한 결의 삶을 살아본 사람.’을 콕 집어 만나고 싶은 걸 보면. 아무렴. 결국 나 역시도 공감을 원하는 것이자, 배타적인 시선으로부터의 반감은 사지 않고 싶은 마음인 게다.


묵혀둔 마음 털어내자고 오랜만에 쓰는 글도 다시 읽으며 다듬는 일이 잦다. 결국은 저장 버튼을 누르고 글을 발행하지는 못한다.


잘 쓰는 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잘 쓴다는 건 누가 평가해 주는 것일까. 친절한 퇴고 작업은 스스로의 만족감을 향한 것일까. 아님 타인을 향한 마음일까. 주제가 정해진 글은 생각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꺼내놓아야 할까. 글로 내 보이는 마음의 솔직함은 또 어디까지여야 할까.


스스로에게도 고백하기 어려운 솔직함을 타인에게 기꺼이 내 보인다는 것은 글을 쓰는데 나를 가로막는 큰 어려움이자, 몹시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가볍게 쓰는 대부분의 글은 철저한 자기 독백 정도 되는 것 인데도 말이다.


 개인적 감정이 비판받거나 평가받지 않아도 되고 보편적이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감정소비 창구로 글을 선택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쓰고 싶은 마음에 숱하게 퇴고를 하는 내 모습이 이질적이고 모순적이다.


글쓰기가 좋은 이유는 타인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고내 감정을 탈탈 털어 낼 수 있어서였다. 이면에는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존재한다. 나를 위해 잘 쓰고 싶은 건지 타인과 공유하기 위해 잘 쓰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무슨 일이든 잘하고 싶은 욕심이 발동하는 건지도. 재주 없는 글을 쓰고 읽다 보면 맞춤법 틀린 곳, 부적절한 조사와 어미의 선택들이 눈에 띄고 또 띈다. 수정과 저장을 누르길 반복한다.


작가의 친절한 퇴고 작업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 인지 타인을 향한 배려심인지 알 수 없지만, 오늘도 저장되어 있는 글 중 몇 개를 불러와 어설픈 솜씨로 다듬어 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