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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깎이 Jun 26. 2018

핑크, 딸기맛, 공주 옷

너무나도 쉽게 중독된 여자여자한 것들

딸을 낳고 나는 의식적으로, 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분홍색을 피했다. 분홍색 옷도, 레이스 달린 옷들도 사지 않았다. 예쁜 여자 아이 옷은 넘쳐났지만 나는 아이 돌잔치 때에도 드레스를 입히지 않았다. 네다섯 살 여자 아이들이 예쁜 리본 핀, 왕관 핀을 머리에 꼽고 분홍색 옷으로 차려입은 것을 볼 때에 내 딸만은 저렇게 되지 않길 바랬다. 그리고 그 딸이 지금 네 살, 세 돌을 앞두고 있고 제일 좋아하는 색은 핑크다.


아마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떤 구체적인 이유나 사건이 있었다기보다 남자아이들은 무얼 해도 거리낌이 없었고 자유로워 보였기 때문에 여자로 태어난 것이 어쩐지 좀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나는 그 좋다는 딸보다 아들을 낳고 싶었다. 

나 자신이 그렇듯 내 아이에게도 바지에 티셔츠를 자주 입혔고 여성스럽다고 여겨지는 옷, 분홍색 옷은 잘 입히지 않았다. 그나마 있는 것들은 물려받은 것, 선물 받은 것들이었다. 모든 것은 어린이집에 다니고 아이에게 또래 관계가 생기면서부터, 각종 매체에 노출되면서부터, 그리고 내가 아이를 설득할 일이 많아지면서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어린이집에 돌아와서 아이가 'oo이가 오늘 공주옷 입고 왔어요.'라는 말을 했다. 내가 아는 바 oo이는 언니가 있고, 자주 원피스와 분홍색 옷을 입었다. 그리고 나의 바람과 달리 당연하게도 아이의 입에선 '나도 공주옷 입고 싶어요.'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여기에 더불어 아이는 유튜브의 바다에서 뽀로로에 등장하는 요리를 잘하는 원피스를 입은 핑크색 루피, 머리에 리본을 달고 있는 상냥한 분홍색 구급차 엠버를 만났고 더 나아가 시크릿 쥬쥬와 화장하는 캐리 언니를 알게 되었다. 아마도 이 모든 상황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핑크와 레이스, 치마 같은 것이 여자, 예쁜 것, 착한 것 등과 연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무엇보다도 나였다. 아이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움직이는 것이 핑크라는 것을 알고 나는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보호하기 위해 핑크를 이용했다. 핑크색 옷으로 어린이집에 안 가려는 아이를 설득하고, 양치를 시키기 위해 핑크색 칫솔을 사고, 배변훈련을 위해 핑크색 팬티를 사고... 이런 과정에서 나 역시 핑크에 무뎌졌다. 그렇게 우리는 핑크에 물들어갔고, 아이는 정말 딸기맛이 제일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스크림을 고를 때에도 마카롱을 고를 때에도 분홍색 딸기맛만 선택했다. 

갑자기 정신이 든 건 얼마 전 아이 화장품을 사면서였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도 화장을 안 하지만 그 가끔 하는 화장을 보면서도 아이는 날 보면서 따라 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며칠 전 우연히 들른 동네 장터에서 핑크색 유아용 매니큐어와 공주가 그려진 립글로스를 팔길래 샀다. 그저 기뻐할 아이의 표정을 상상하면서. 아이는 정말로 좋아하며 발에 매니큐어를 칠하고 립글로스를 발랐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우연히 탈코르셋에 관한 글 여러 편을 읽었다. 머리가 너무나 복잡해졌다. 


단지 핑크의 문제가 아니다. 핑크색 옷 좀 입히고 리본핀 좀 꽂아주면 어떤가. 그보다 나는 너무나도 짧은 기간 동간 동안 핑크에 빠져든 나와 내 아이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쉽고 빠르게 우리 사회가 생각하는 여성성, 여자를 상징하는 것들이 체득되는구나 싶어 놀라버린 것이다. 여자인 엄마의 행동, 내가 하는 말과 내가 사준 것들이 내 딸에게 큰 영향을 준다는게 무서워진 것이다.  


놀이터에서 놀던 여섯 살 언니들 중 화려한 분홍색 레이스 치마를 입은 언니한테서 눈을 떼지 못하며 '언니 정말 예쁘다.'라고 말한 딸이 떠오른다. 나는 복잡한 마음에 겨우겨우 단어를 골라가며 '너도 지금 좋아 보여.'라는 이상스러운 문장을 내뱉었다. 6살짜리 여자 아이들은 분홍색 치마를 입고도 놀이터에서 뛰고, 바닥에 주저앉고, 미끄럼틀도 타면서 놀지만 조만간 치마를 입고 행동거지를 얌전히 할 때가 올 것이다. 


나는 내 딸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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