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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깎이 Feb 18. 2021

엄마라는 사람의 자가격리

코로나가 일깨우는 나의 자리

3주 전쯤 우리 사무실에도 결국 확진자가 나왔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부랴부랴 전 직원이 코로나 검사를 받았고, 다행히 추가 확진자는 없었다. 그러나 그와 식사를 하거나 대화를 나눴던 사람들이, 사무실의 거의 절반의 인원이 자가격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서로 다른 재택근무 일정으로 인해 그와 마주칠 일이 없었던 나는, 딱 하루 오전을 그와 같은 시간 같은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자리는 바로 내 대각선 자리였다. 


코로나 검사를 받고 집에 와서 바로 방에서 자가격리를 시작했다. 올해 각각 일곱살, 네살이 된 두 아이는 엄마를 볼 수 없는거냐면서 칭얼대다 급기야 울었고, 남편은 설마 걸렸겠냐면서 사태를 심각히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고 코로나 검사 결과 음성이라는 보건소의 문자를 받았다. 그러나 어딘지 찜찜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오전이 지나고 점심시간이 지났다.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 만 하루가 지나고 있었는데 아무에게서도 아무 연락을 받지 못한 나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곱씹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02-2***-**** 라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나는 자가격리를 직감하고 전화를 받아 보건소 직원과 통화를 했다.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마스크도 쓰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가격리를 하는 편이 안전하겠다는 말이었다. 그 뒤로 격리 지침에 관한 내용이 우수수 문자로 쏟아졌고, 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직장 동료 및 상사, 가족들에게 전화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앞으로 어쩌지.'


막막함과 불안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자가격리하는 동안은 물론이고, 정말로 코로나에 걸리면 더더욱이나 아이들이 문제였다. 그리고 정신없이 공식적인 자가격리가 시작되었다. 확진자와 접촉한 날부터 14일 동안 자가격리이므로 어찌어찌 이틀은 지났지만, 앞으로도 12일을 아이 둘을 돌보면서 재택근무를 해야 하는 남편은 도무지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아이 둘과 씨름하며 재택근무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나는 안다. 꽤 오랫동안 일주일에 2~3일은 그걸 반복해왔으니까. 그렇지만 남편은 아니었다. 삼시 세끼를 차려 먹고, 먹이고, 일하면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도무지 가능한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고되고 정신없다. 그렇게 이틀 동안은 정말로 힘들었다. 남편도 괴로워했고, 아이들은 더더욱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 수시로 방문을 열고 엄마를 보고 싶다고 말하곤 했고, 안아달라고 했다. 더구나 평생을 내가 재워야 자던 두 아이는 잠잘 때마다 울며 힘들어했다. 그래서 난 바로 옆방의 남편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나는 우는 아이들을 달래지 못해서, 힘든 남편을 도와주지 못해 속상하고 답답했으며, 그 와중에 코로나에 정말 걸리는 건 아닐지 불안에 떨었다. 방 안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수시로 소독제를 뿌려댔다. 


그리고 세 밤이 지나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아이들이 날 찾는 횟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심지어 밤에 날 찾지도 않고 잠들었다. 남편의 목소리도 안정적으로 바뀌었고, 모두가 일상에 적응해 가는 듯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이들은 종종 내 방문을 똑똑 두드리며, '엄마 보고 싶어서 왔어요'라고 말했고, 그러면 우리는 서로 마스크를 쓴 채 간격을 두고 손 인사를 했다. 아이들은 안방 베란다 창문 쪽으로도 와서 똑똑 두드리며, '엄마'하고 부르곤 이런저런 수다를 떨기도 했다. 사실 처음 3일간 아이들이 너무나 나를 찾았고, 남편이 쓰레기를 버리러 가거나 물건을 사러 슈퍼에 가느라 잠시 집을 비울 때, 아이들이 급하게 나를 찾기도 해서 자가격리가 될까 싶기도 했었다. 그런데 인간의 적응력이란, 게다가 아이들의 적응력이란 놀라운 것이었다. 점점 아이들은 내가 방에 있다는 것도 잊은 듯이 잘 지냈다. 더 놀라운 것은 남편이었다. 나의 배우자도 이렇게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있는 사람이었단 말인가? 삼시 세끼를 나보다 더 잘 차려줄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나 여러 가지로 놀아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인내심이 큰 사람이었다는 말인가? 게다가 규칙을 정하고 잘 지킬 수 있도록 하는 점은 물렁물렁한 엄마에 비하면 너무나 잘하는 점이어서 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였다. 


놀라움이 지나고 나에겐 우울함이 찾아왔다. 안방의 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침대에 홀로 누워서 핸드폰을 쳐다보고, 밥은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만 먹었다. 무기력했고, 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더 외로워졌다.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 시간도 있었으나, 아니었다. 그저 무기력했다. 그 상태로 시간은 흘렀다. 설 연휴도 홀로 보냈다. 하루에 두 번 자가격리 안전보호 앱으로 자가진단을 했고, 하루에 두 번 보건소의 AI로부터 상태 점검을 하는 전화도 왔다. 결국 공식적으로만 하루에 네 번 열을 쟀지만, 사실은 체온계를 내 몸처럼 옆에 두고 수시로 열을 쟀다. 충전기가 꽂힌 휴대전화도 늘 내 옆에 있었다. 닫힌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의 시간이 아무런 생동감 없이 흘러갈 때도, 아이들과 남편의 시간은 그럭저럭 즐겁게 지나갔다. 시간은 흘러 드디어 격리 하루 전이 되었고 마지막이 되었으면 하는 코로나 검사를 받고 왔다. 그리고 그 하루가 정말로 잊지 못할 고통의 밤이 되었다. 아무런 증상은 없었지만, 혹시나 내가 무증상 감염자라면, 새벽에 구급차에 실려 간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수많은 시나리오를 생각하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그리고 오전 8시가 조금 넘어 마침내 '음성'이라는 결과 문자를 받았다. 그리고 정오가 되어 자가격리가 해제되었다. 가장 먼저 아이들을 안아주었다. 


자가격리가 해제되기 직전이었는지 직후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문득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정환이네 엄마, 라미란 여사가 이틀간 집을 비웠다가 예상치 못한 시점에 집으로 돌아오는 에피소드. 처음 그 에피소드를 봤을 때 내가 의아했던 건 바로 정환이 엄마의 감정 상태였다. 아이들과 남편이 저렇게 잘 지내면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닌가, 비로소 자유를 찾을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라미란 여사의 그 마음이 이해된다. 제발 나의 손이 닿지 않아도 잘 지내줬으면 하는 마음과 그래도 내 자리가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모순된 감성이 뒤섞인 상태. 자가격리하는 동안 나 없이도 잘 지내는 아이들과 아이들을 잘 돌보는 남편의 모습이 좋았지만, 한편으로 섭섭하기도 했던 내 마음과 조금 닮은 것 같았다. 그래도 2주 격리하는 동안 많은 것을 얻었다. 내 손이 닿지 않아도 많은 것을 잘 할 수 있는 아이들과 남편의 잠재력을(!) 깨달은 것이 첫 번째, 너무나 오랫동안 아빠의 육아를 믿지 못하고 그리하여 남편의 육아 자신감을 키우는 데 방해가 되었던 나에 대한 깨달음이 두 번째, 그리고 이 두 가지를 통해 이제는 좀 더 엄마 아닌 나의 몫을 늘려도 되겠다는 안도감, 혹은 그래야겠다는 다짐이 세 번째이다. 남편의 마음은 아직 못 들어봤지만, 그 역시 많은 것을 느낀 2주였을 것이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어떤 면에선 우리 가족에게 꽤 큰 전환점이 되었다. 서로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시간, 그리고 서로 좀 더 믿을 수 있는 시간, 서로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은 순간들의 모음이었다. 너무 늦은 깨달음일지 모르나 너와 나의 자리와 역할을 생각하고, 앞으로의 우리 가족의 시간을 좀 더 잘 꾸려나갈 수 있는 그 시작점을 마련해 주었기에 최악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2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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