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에피소드 어떠셨어요?
글을 쓰며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뭘 못 참느냐 보다 나는 어떤 동기를 갖고 있느냐를 먼저 고민할 필요가 있겠구나. 모든 감정의 원인은 결국 나는 뭘 원하는 사람인가에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일이 벌써 10년도 더 훨씬 전의 일이니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그동안 전 난 어떻게 일해야 할까, 어떻게 일해야 나만의 차별점을 가질 수 있을까를 참 많이 고민했어요. 그런데 커리어적인 고민을 열심히 했지 정작 나라는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노력은 부족했더라고요. 21년에서야 인생 첫 갭이어를 10달 가까이 가지며 마흔을 훌쩍 넘기고서야 제 자신 그대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어요. 그때 이 에피소드가 갑자기 떠오르더군요. 그땐 대체 뭐가 그리 화가 났던 것일까..
전 회사생활을 꽤 늦게 시작했어요. 20대엔 IMF의 타격을 제대로 받은 집안 형편 때문에 중퇴했다가 다시 학교에 들어갔고 휴/복학을 반복하느라 졸업이 늦었죠. 생계활동을 하느라 학교는 거의 못 가 엉망인 학점에 나이는 먹었고 마침 하던 일이 잘 되어 사업화하면서 일반 직장 취업은 더 늦어졌어요. 서른에야 말단 사원으로 시작했고 다시 한번 창업했다가 크게 실패도 했어요. 그런 다음 입사한 회사였죠. 어릴 적 나름의 큰돈도 벌어봤고 큰 실패도 해봤기에 말단 직장 생활이 참 시시했던 거 같아요. 오만했던 거죠. 답답해하고 성에 안 차 빨리 승진해 동기들보다 몇 년 늦은 시간을 만회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 방법으로 전문가가 되어야겠다 결심했고요. 이제와 생각하면 대체 전문가란 무엇이었을까.. 막연히 그 키워드를 쫓아 달렸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급한데 지지부진하면 짜증이 너무 올라오더라고요. 워낙 치열했던 20대~30대 초반을 살면서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야겠단 동기로 살기도 했어요.
늘 급했고, 속도가 중요했으며 내가 그렇게 하는 만큼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지 않는 걸 견디지 못했던 거 같아요. 이런 점들이 모여 저의 가장 강한 동인 중 하나는 '업무 진전감과 속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상대는 전문가이냐 아니냐, 내가 배울 게 있느냐 없느냐. 이에 더해 내가 사는 만큼 다른 사람도 열심인 것 같지 않으면 '성의 없음'으로 치부하며 한심해하고 화가 났어요. 늦은 출발을 만회할 방법은 남들보다 훨씬 빨리, 많이, 열심히 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당시의 갈등도 단순히 업무 스타일이 다르다거나 속도가 나지 않는다가 원인은 아니었어요. 갈 길이 먼데 언제까지 이 프로젝트에 묶여 있어야 하냐는 답답함, 성실하지 못한 업체에 대한 분노, 그들에게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리더에 대한 불만이었어요. 어찌 보면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그렇게 해서 이 정도인데 제 기준에서 그 정도로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는 게 억울해했던 것도 같아요. 그래서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 않았을까.
많이 유연해졌다고는 하나 저는 아직도 꽤나 직설적이고 불편한 말을 거침없이 하는 편이에요. 일하며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직설화법을 쓰고 있지만 저땐 그냥 쏟아내던 시절이죠. 어린 나이에 저보다 훨씬 나이나 경력 많은 직원들을 데리고 부모님 뻘 고객을 대하며 늘 저를 증명해야 했어요. 그 과정에서 잘못된 리더십이 강화되어 버렸죠. 무시당하지 않으려 척하다 어느새 강압적이고 무례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일하자고 하는 말인데 왜 감정적으로 받냐 뭐라 하고 "나는 할 말을 했을 뿐이야"란 생각을 하기도 했고요. 강점보다 단점에 집중하며 고치려 했고 좋게 돌려 말하면 해결 안 된다는 생각도 강했어요. 그렇게 쏘아붙이곤 식사 시간이 되면 바로 웃으며 밥 먹으러 가자고 하는 저였죠. 일하다 보면 언쟁도 하는 거고 사람을 공격한 게 아닌데 왜 기분이 나쁘냐며.
어느 날 다른 지인이 제게 이런 말을 했어요.
"네가 하는 말이 맞긴 한데 기분이 되게 나빠"라고. 어떤 이는 "되로 주고 말로 받을 거 같아서 말하기 어려웠어"라더군요. 어떤 선배는 "싸웠는데 넌 아무렇지 않다고 웃는 거 쿨한 거 같지? 그거 진짜 이기적인 짓이야. 상대는 아직 안 풀렸는데 네가 그러면 꽁한 사람 만드는 거랑 뭐가 달라"라고 했어요. 상대 감정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는 걸 꼬집었죠.
생각해 보면 그전까진 이런 피드백을 받아 본 적이 없어요.
말 그대로 되로 받으면 말로 주는 사람이었거든요. 워낙 강압적이고 상처받기 싫어 온몸에 가시를 내두르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제게 이런 말을 해주질 않았으니까요. 그들을 그렇게 만든 제게 잘못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생각해 본 계기였죠. 하나 알게 된 긍정적인 면이라면 제가 생각보단 피드백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었구나라는 거였어요.
"아, 나는 피드백받는 걸 좋아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내게 피드백을 주고 싶지 않게 만들고 있었구나"를 깨닫게 된 시기이기도 해요. 다음 에피소드에서 이어질 얘기라 이쯤 하고. 저는 상대에 대한 이해 노력 없이 제 기준에서만, 제 조급함으로만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왜 내 말 안 들어~!"라고 외치고 있던 거였어요. 그게 안 통한다 싶으면 소위 말하는 '쥐 잡듯이' 쪼아댔죠.
저때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여전히 답답해할 거고 상황이 확 변하진 않을 거 같긴 하지만 적어도 화법은 바꿀 거예요.
"저는 손이 빠르고 실행력이 좋은 편인데 OO님은 ~부분에 강점이 있으니 우선 우리가 할 일을 나눠 보면 어때요. ~~~~는 ~~에 넘기고 신경 끄면 되고, 이건 이렇게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건 OO님 어떻게 생각하세요?"처럼요. 물론 에피소드 상황에서도 내용은 같았어요. 하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상대에게 당신은 이걸 왜 안 하고 못하냐면서 다그치고 이렇게 저렇게 하자 명령하듯 말했습니다.
지금이라면 빠른 사람이 잘할 일과 느리지만 신중한 사람이 잘할 일을 잘 나눠 서로 잘하는 걸 먼저 하며 전체 속도를 높이자는 식으로 말할 거예요. 낙관적이니 강점혁명이니 하는 말을 좋아하진 않지만 팀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닐까요. 서로 내 강점을 약점으로 가진 사람, 내 약점을 강점으로 가진 사람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전체를 돌아가게 하는 거. 아니면 혼자 일하는 수밖에요. 한 사람이 다 잘할 수 없어 함께 하는 게 팀인 건데 서로의 단점에 집중하는 건 자원낭비인데 말이죠.
지금도 직설적이고 할 말 하는 사람이란 자기 합리화를 하며 상대를 불편하게 하거나 상처 줄 때가 있어요. 조심한다 하고 의도는 아님에도 제 말이 누군가에겐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했어요.
"아시겠지만, 저보다 훨씬 많이 고민하셨겠지만", "제가 적절한 워딩이 생각이 안 나서 이렇게 표현하는데 혹시 오해하거나 언짢으시면 말씀해 주세요"란 말을 덧붙여요. 미리 양해를 구하는 거죠. 이렇게 말한다고 모든 게 매끄럽진 않겠지만요. 그리고 말미에 다시 한번 말씀드려요. "혹시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실례되는 표현을 한 게 있을까요?"라고.
마지막으로 저때로 돌아간다면 선배와 좀 더 대화를 많이 할 거예요. 필요하면 밥을 먹든 가볍게 한 잔 하든 티타임을 자주 가지든. 입사하고 오래되지 않았을 때라 서로를 잘 알기엔 부족했어요. 인간적 신뢰와 이해가 전제되었다면 상황은 훨씬 달랐을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꽤 하는 편이에요. 제 기준 누가 알아도 상관없을 수준에서 사적인 얘기를 솔직하게 하죠. 선을 지킴에도 사람들은 제가 꽤 솔직하단 말을 해줘요. 먼저 저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어느 정도 심리적 안전감을 주고 대화를 위한 최소한의 라포 형성이 가능해지더군요. 고슴도치 마냥 가시를 바짝 세우고 "어디 한번 건드려 보시지!"에서 난 이런 사람인데 이렇게 말해주면 더 좋을 거 같아를 내보이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걸 이젠 알게 되었거든요.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 거 같아라는 추측과 예측 가능성을 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는 심리적 안전감을 가질 수 있어요.
관계라는 건 서로 주고받아야 하는 거지만 언제나 처음엔 한쪽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상대가 손을 내밀 수 있게 만들어 주던가 내가 먼저 내밀되 상대가 움찔하지 않게 다가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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