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을 잃어버리고 나서 깨달은 무소유의 진리
나는 기록형 인간이다. 이러한 이유로 기록의 도구인 펜에 대해서도 뚜렷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
필기를 업으로 하던 학생 때는 좁은 행간 사이에 설명을 끼워 넣는 게 중요했다. 때문에, 교과서의 텍스트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얇고 작게 쓰이는 펜을 선호했다. 그래서 필통에는 날카로운 촉을 가진 잉크펜들이 색깔별로 가득했다. 혹시라도 공간을 잘못 계산하여 여백이 부족하다거나, 필기가 다른 텍스트를 침범하면 속이 상하곤 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뭉툭한 촉을 가진 볼펜은 선택받지 못했다.
수년의 학창 시절을 거치며 확고히 자리 잡아온 펜에 대한 고집이었다. 그러나 승무원 일을 하게 되면서 이러한 선호는 시간이 무색하리만치 달라졌다.
# 승무원과 펜
펜이 없다고 말하는 승무원은 있어도 펜 없이 일하는 승무원은 없을 것이다. 이에 저마다 비행 중 사용하는 펜에 대한 나름의 선호도 존재한다. 나의 경우에는 <클립이 달려있으며, 뚜껑이 없고, 잃어버려도 괜찮은 것>.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볼펜만이 나의 핸드백 모서리를 따라 자리할 수 있다.
# 클립은 필수
먼저 고정을 위한 클립은 필수이다. 클립이 있어야 핸드백의 가장자리에 꽂아 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꽂아놓을 수 있어야 쉽게 찾아 쓸 수 있다.
또한, 펜은 주머니에서 미끄러져 나가기 쉬운 물건이다. 기내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 보면, 펜이 빠져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때문에, 클립이 있으면 종이 등에 고정이 가능하여 잃어버릴 부담을 줄일 수 있다.
# 뚜껑이 없는 게 좋아
다음으로는 뚜껑이 없어야 한다. 분실할 것이 너무나 뻔하기 때문이다. 사실 뚜껑을 잃어버린다고 해서 볼펜을 사용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뚜껑이 없으면 가지고 다니기 어렵다. 볼펜의 잉크가 유니폼 또는 핸드백 내부를 오염시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행 중에는 펜 뚜껑을 열고 닫는 것조차 거추장스럽다. 대부분 순간적인 필요에 따라 펜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캐빈에 펜 뚜껑을 떨어뜨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다. 때문에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사용할 수 있는 뚜껑 없는 펜이 편하다.
# 잃어버려도 괜찮은 펜
마지막으로 잃어버려도 괜찮은 펜이어야 한다. 어찌 보면 이게 가장 중요한 조건일지 모른다. 업무상 손님에게 빌려드리고 돌려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빌려드릴 때는 다시 돌려받을 거라는 기대는 크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사실 기내 컴파트먼트(수납공간)에 잠깐 둔다는 것을 까먹고 나와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한 번 잃어버리면 다시 찾을 가능성이 없으니 잃어버려도 괜찮은걸 택하는 게 좋다. 어찌 보면 이 마지막 조건이 가장 까다로울지도 모른다.
# 그래서 3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펜은 무엇
하지만 놀랍게도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펜이 세상에 존재한다. 바로 호텔 펜.
보통 호텔에서는 손님의 편의를 위해 필기구를 방마다 비치한다. 그리고 손님이 원하면 가지고 갈 수도 있다. 때문에 비행을 할수록 호텔 펜이 늘어나는 것은 승무원에겐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크루들 사이에선 호텔 펜에 대한 선호도 각각 다르게 존재한다.
# 최고의 호텔 펜은
카타르 크루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호텔 펜은 바로 쉐라톤이다. 비행 중에 이걸 쓰고 있으면 나도 이거 좋아해! 소리를 한 번은 들을 수 있으며, 호텔 펜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고 my favorite 얘기가 나오는 게 sheraton이다.
개인적으로는 마냥 펜촉이 뭉툭하고 부드럽기만 해서 선호하지 않는다. 게다가 펜 길이가 짧고 몸통이 넓은 편이라 내 손에는 그립감 또한 좋지 않다. 부드럽게 쓰이나 장시간 필기에는 피로감을 주는 형태이다.
한편, 내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호텔 펜은 크라운 플라자 펜과 힐튼 펜이다. 일단 크라운 플라자 펜은 바디뿐만 아니라 촉도 길쭉한 편이라 사용감이 좋다. 간혹 정신을 놓고 있으면 이 펜을 계속해서 딸깍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가장 선호하는 힐튼 펜이다. 트위스트 방식으로 촉을 오픈하며, 가볍고 필기감이 부드러워서 좋아한다.
# 힐튼 펜의 단점을 발견한 하루
오늘 비행 중에 힐튼 펜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이 펜의 단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을 것’이란 3번 조건을 만족하지 못한단 것이었다. 막상 이 펜을 잃어버리고 보니 꽤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 결국 공수래공수거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기에 잃어버려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것이 되고 나니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혹자는 지금 쥔 것이 네 것이 아니고, 지금 놓은 것도 네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저 펜이라는 거울로 마음의 가난함을 비춰본 것만 같아 여러 감정이 앞선다. 이 대수롭지 않은 펜을 대하며 공수래공수거의 무소유를 연습했던 하루가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