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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가 Jan 07. 2021

내가 정인아 미안해 해시태그를 쓸 수 없는 이유

미안하다는 말 대신...



"정인아 미안해" 해시태그가 sns에서 파도를 일구고 있는 요즘, 웬만하면 해시태그 운동에는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나이지만 이번 해시태그 운동만큼은 썩 내키지가 않는다. 고인이 된 아이에 대한 애도와 안타까움 분노의 힘을 보여주자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왜 하필 아이의 이름을 이용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피해 아동의 이름으로 이 사건이 기억된다는 것도 안타깝지만 이 해시태그가 자칫 타인의 비극에 대한 슬픔을 소비하는 데에서만 끝날 것과 역시나 해시태그를 이용해서 정인아 미안해 굿즈 같은 것을 만들어낼 생각을 하는 파렴치한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남의 비극을 돈벌이로 사용하는 소시오패스 같은 놈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상황을 어떻게든 자기 입지 굳히는 데 이용하려 들 정치인들의 얄팍하고 괘씸한 속셈들이 연쇄작용처럼 일어날 것을 생각하니 더 안타깝다. 언론에서는 사건의 잔인함과 슬픔을 전시하여 감상적 요소로 필력 하는데만 급급하다. 이들의 경쟁은 또 무얼 위한 것이냔 말이다.  

물론 이 해시태그 운동이 진정서 작성하기 같은 좋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기도 하다.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진 것도 긍정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더불어 이번 사건을 통해 그동안 사각지대에 있었던 홀트 운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고, 이참에 입양 후 사후관리 시스템이 법적으로 더 견고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내 sns에 아이의 이름을 올리지는 못하지 싶다. 지켜주지도 못했으면서  아이의 이름이 학대당하는 아이들의 비극적인 심볼로 만들게 될까 차마... 내키지가 않는다.

얼마 전, 독서 모임에서 어느 작가분의 책을 읽고..

글도 훌륭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도 훌륭한 책인데 왜 깊게 와 닿지가 않는지에 대해 이야기 나눈 적이 있다.

사실  내 입으로 가식이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서 이리저리 돌려 말했던 것 같은데 우선 작가님께 죄송하다. 지나고 보니 남의 글에 이러니 저러니 평가하려든 것 부터가 내 오만이었다. 그러나 내가 느낀 묘한 이질감은 사실이었다. 읽은 지 꽤 된 책을 가지고 이야기 했던터라 기억이 나질 않았던 것도 사실이어서 당시에는 딱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는데 며칠 전 은유 작가님이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연대하며 중대재해기업 처벌법을 위해 1인 시위하는 모습들을  sns를 통해 살펴보다가 그 이유가 번뜩 생각났다.
쌍용 해고 노동자들의 고공 농성을 기리며 시인이자 사회학자인 어느 작가가 보낸 시 한 편을 말이다.
시를 읽으며... 이 글은 사회의 아픈 면모를 드러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결국  감상에 그치고 말았구나.... 그렇게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노동자들을 위해 시를 바치는 작가의 그 마음 역시 숭고하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부조리가 규칙이 되어버린 세상 앞에 시를 쓰고 있는 것에 대한 말하자면 윤동주 적 부끄러움이 작가의 안에도 내재되어 있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해서 작가의 잘못도  아니고  무리한 독자의 요구에 지나지 않는다. 알면서도 내심 서운했던 것은 어쩌면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보태는 법은 시 한 편이 아니라 함께 발로 뛰거나 그것도 아니면 후원 계좌 안내 같은 현실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탓 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많이 보편화된 지하철 스크린 도어가 생긴 이유가 철로로 뛰어들어 자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지나간 한 기사를 통해 스크린 도어 설치가 묻지 마 살인으로 철로에 떨어져 사망한 아내를 위해 한 남편이 지하철 공사를 상대로 한 2년간의 법적 공방을 통해 만들어낸 성과라는 걸 알았다.  
스크린 도어 설치 이후 남편 분은 인터뷰에서
“여보 신문 봤어? 당신은 고통스럽게 갔지만 그게 아주 헛된 일은 아니었나 봐”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는 그 피해자분의 이름은 끝까지 모르겠지만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피 땀 흘려 노력한 남편분 덕에 안전함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 분의  추모 방식에는 존경심이 든다. 슬픔과 분노의 방향이 어디로 흘러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표지판과 같은 선례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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