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 눌어붙어 보았다

존재의 상대성 이론

by 세이하이
하, 나의 존재는 어디로 가는 중일까?
도착 이틀 만에 커피 하나 주문해 놓고 기다리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괜히 회사를 그만두었나?
어떻게든 붙어 있을 걸 그랬나?
그러다가도 또 이런 생각도 했다.
거기에 붙어 있든 여기 바닥에 붙어 있든
어차피 어딘가 눌어붙는 건 매한가지라는.


작아질 줄 알아야 커질 줄도 아는 법일까?

작년 8월, 호주 브리즈번에 처음 도착했을 때가 생각난다.


도착 다음 날, 커피 한 잔이 고파 숙소 근처 카페에 갔을 때였다. 여름으로 넘어가던 즈음이었지만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추위를 유난히 못 견디는 나는 경량 패딩을 입고 등에는 노트북이 든 묵직한 가방을 메고 있었다. 할 일이 많았다. 집을 알아봐야 하고, 이력서도 만들어야 했다. 영문 이력서라니, 생각만으로 아득했다.


캔 아이 겟 스몰 라떼...?

속으로 몇 번이고 연습한 문장으로 주문을 마쳤다.


사실 “원 스몰 라떼 플리즈.”라고만 했어도 직원이 알아듣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호주 오기 전에는 “캔 아이 겟” 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입 밖에 제대로 내본 적이 없었다. 필리핀에서도 배우지 않은 것도 아니면서 막상 카페에 가 주문하려 하면 나도 모르게 “캔 아이” 대신 “원”이 먼저 대뜸 튀어나오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호주까지 와서, 여기서 일 하고 살아야 할 사람이 커피 한 잔 주문하는 것도 심장이 발발거려서 또다시 두 번째 손가락 펴 보여가며 “원, 원” 거리기는 싫었다.


영어는 그렇다. 아니, 사실은 모든 언어가 그렇다. 내가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건 귀로는 더더욱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러 연습해서 뱉어 보았던 것인데 심장 뛰는 건 같았어도 뒷맛은 확실히 달랐다. 긴장이 풀리며 깊은숨이 뱉어지는 게 꼭 마땅히 할 일을 다 마친 사람 마냥 뒷목이 가벼워졌다.


이제 커피만 잘 받아가면 이곳에서의 임무는 무사 완료라는 생각에 팔짱을 끼고 주위를 둘러보던 그때였다. 네댓 명쯤 되는 현지인 무리가 왁자지껄 대화하며 카페로 들어왔다.


그들은 세미 정장 차림으로 목에는 사원증으로 보이는 네임택을 사이좋게 걸고 있었다. 남녀 가릴 것 없이 체구가 얼마나 크던지 한국에서도 작은 편인 나는 그 옆에 있자니 마치 거인 나라에 떨어진 난쟁이가 된 것만 같았다.


‘호주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키가 큰가? 거 참, 사람 기죽일 정도로 크네.’ 나는 괜히 팔짱 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사람은 두 가지로 작아질 수 있다. 하나는 살이 빠지거나 키가 줄어들어 몸이 작아지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이 쪼그라들어 존재 자체가 작아지는 것이다. 나는 하필 저 카페 앞에서 두 가지 모두 작아져 버렸다. 한국보다 평균키가 몇 센티는 더 높은 나라에서 원래 작던 키가 더 작아져 버린 것과, 이방인으로 마주친 현지 직장인들 앞에서 자존감이 바닥에 눌어붙은 껌처럼 납작해져 버린 것이다.


하, 나의 존재는 어디로 가는 중일까?

도착 이틀 만에 커피 하나 주문해 놓고 기다리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괜히 회사를 그만두었나?

어떻게든 붙어 있을 걸 그랬나?


그러다가도 또 이런 생각도 했다.

거기에 붙어 있든 여기 바닥에 붙어 있든 어차피 어딘가 눌어붙는 건 매한가지라는.


직장인이라는 타이틀이 나를 보호해 줄 때가 있었다. 그만둘 즈음에는 큰 스트레스도 없이 일했다. 물론 피곤할 때는 많았다. 일이 즐거운 건 아니어서 퇴근하면 보상 심리가 폭발했고, 늘 밤의 끄트머리를 바짓가랑이 잡듯 붙잡다가 늦게 잠이 들었다. 금요일에는 미칠 듯이 행복했고, 일요일엔 괴로웠다. 아니, 토요일 밤부터였나?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서가 아니라 하기 싫고 재미없는 일을 해야 해서 그랬다. 나는 그런 걸 오래 견디는 성격이 못 되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들이 들어차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여하튼 나도 그럴 때가 있었다. 커피를 각성제 삼아 하루하루를 버티던 때가.

그런데 왜 갑자기 바닥에 들러붙은 껌이 됐냐면, 주문을 겨우 끝마쳐서 그렇다. 그 한 문장을 연습해서 내뱉어서. 아직 집도 없고 직장도 없어서. 영어로 이력서 쓸 생각만 하면 머리가 핑 돌아서.


그게 그렇게나 어렵게 고민하고 결정한 퇴사에 대한 후회를 단숨에 몰고 올 만큼,

나는 낯설디 낯선 그 나라가 참 많이도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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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으로 가는 8월의 브리즈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