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상담을 앞둔 신변정리라고나 할까
다음 주 월요일에 상담을 시작한다.
상담을 결심하는 첫 글을 쓰고 2주 정도 기다렸다. 덮어뒀던 나의 이야기들을 하나씩 들춰내려니 설레기도 하면서, 내가 애써 부여잡고 있었던 것들이 흔들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된다. 상담자분과 잘 맞아서 이 상담이 성공적으로 끝나도, 상담을 하다가 그만두는 결과를 맞이하여 내가 원하는 부분을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간에 이 시작의 계기로 하여금 유의미한 순간들이었음을 기억하기 위해 초심자의 마음을 기록해 본다.
이십의 끝자락에서 상담을 결심 한 건, 또 연애 때문이다.
조금 어렸던 나에게 상담이란, 대의적인 어떤 것(예를 들어, 진로나 인간관계)이 만들어 낸 거창한 우울함의 막다른 길에 다다라서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해야만 하는 비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인생이 터닝포인트라고 여길만한 사건을 겪지도 않은 지금에 왜 상담을 받느냐고 생각해 본다면, 그 이유는, 나이를 좀 먹었다고 하는 지금에서도 고작 연애 때문이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연애가 얼마나 될까?
그 질문에 봉착하자 모든 게 막연해졌다. 이십 대 끝자락에서 이제는 가족의 일로 고통받거나 친구의 시기질투로 힘들어하지도 않고 적성을 고민하지도 않으나 그 하나가 아직 풀지 못한 난제였다. 주변에 흔히들 외치는 비혼이 내 길이 아님을 깨달은 순간 그 난제는 나를 더 옥죄어 왔다.
과연 나는 괜찮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괜찮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나 또한 괜찮은 사람인가?
이 질문의 깊은 고민 끝에 이번 연애도 끝을 냈다. 사랑받는 연습을 할 수 있을 거라며 쉽게 결심하고 호기롭게 시작했던 연애는 나의 못난 모습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연애가 부차적인 사람들에게 받았던 마음의 상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내 스스로가 싫었다. 시간을 조금 갖고 난 뒤, 나로 인해 눈가가 짙어진 그 사람을 마주하니 더 확신이 들었다. 이 악습이 몇 번째인가. 내 연애습관이 멀쩡한 타인에게 물들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싫어하는 마음이 아닌, 약간의 비겁한 마음과 그를 위한다는 변명으로 이 관계를 정리했다. 더 이상 나의 못난 연애관과 낮은 자존감으로 범벅된 말들을 타인에게 전할 상황 자체를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상담을 앞둔 나의 마음은 꽤 무겁다. 도망친 자에게 낙원은 없다. 늘 하던 연애 습관으로 인해 늘 하던 이별을 한 평범한 어느 순간들의 연속이라, 내 인생이라는 지질의 층이 변질될 만큼 어떤 큰 지진이 일어난 것도 아니지만. 또 한 번의 도망을 친 나에게 상담은 나름 일상을 파고들만큼 시나브로 뿌리내린 어떤 것을 뽑아내기 위한 큰 결심이다.
부디 이 상담의 끝이 지금의 생각과 같이, 어떤 방향에서든 유의미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