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통닭하면 떠오르는 장면

by 윤슬작가

나이에 숫자가 하나씩 덧붙으면서 나도 모르게 고쳐나가는 것들이 있다. 시간이 약이라고 말하지만, 대부분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저장된 것이 많다. 그런 까닭에 일부러 한 번씩 들춰보다가 당황스러울 때가 생겨나곤 한다. 하지만 마냥 싫지는 않다. 어디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된다는 것은 나름은 소중한 수확이기 때문이다. 애써 맞서 싸울 필요도 없고, 새로운 상처를 만들 필요도 없다. 그저 알아차리면 된다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충분할 것 같다. 요즘은 자연스럽게 1인칭 관찰자 시점을 넘어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되는 일이 빈번하다.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에게 안부를 묻는 것처럼 내가 지니고 있는 것들에게 말을 건네면서 어느 순간에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 되기도 한다. 아낌없이 주는 마음을 발견한 날에는 아낌없는 나무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알지도 못했고 보이지도 않았던 장면이 눈앞에서 재생되면 지금부터라도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속삭이게 된다.


며칠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예전부터 에어프라이를 사주겠다고 엄마에게 여러 번 이야기를 했었지만, 엄마는 단호했다. 있던 거나 쓰면 되지, 시종일관 새 물건을 사서 뭐 하냐는 대답이었다. 있는 거 잘 쓰다가 떠나도 이미 충분하다고 했다. 옛것이 있어야 새것이 있다고,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없어서도 안 되는 거라면 모를까,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했다. 그래서 기억에서 잊고 있었는데, 얼마 전 우연한 기회로 부모님께 에어프라이를 보내드렸다. 그런데 엄마의 답변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이건 진짜 신기하더라! 기름이 쪽 빠지는 것이. 이번에는 통닭을 넣어서 했는데, 담에는 돼지고기를 한번 넣어서 해볼 생각이야. 이상하게 느거 아버지는 통닭을 좋아하더라. 여기에 넣어서 해 먹으니까 똑같다고 하네. 너 저번에 돼지고기하는 거 봤는데, 엄마도 똑같이 해 볼게."

"잘 했어. 또 신기한 거 있으면 보내줄게"

"인자는 괜찮다. 있는 거 쓰면 되지!"

"엄청 신기한 거 생기면 그때 다시 알려줄게"

"그래"


엄청 신기한 게 또 어떤 것이 있을까, 잠시 생각에 빠지려는 순간 잊고 지냈던 장면이 불쑥 떠올랐다. 누런 봉투에 담긴 옛날 통닭. 어찌 된 일인지 젊은 시절의 아버지는 술 한 잔을 마신 날에는 꼭 옛날 통닭을 사 오셨다. 그때 시각이 10시든, 11시든, 12시든, 무관했다. 아버지가 통닭을 가져온 날, 그날은 유일하게 아버지가 말이 많아지는 날이었다. 평소의 10배쯤 되었던 것 같다. 공부와 성공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게 대부분이었던 까닭일 것이다. 눈앞에 통닭을 두고서도 마음은 불편하고 힘들었다. 책상에서 졸다가 불려나간 날이어서 그럴 수도 있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일어난 것이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런 까닭에 옛날 통닭이라고 하면 거실에 둘러앉은 나와 동생의 모습이 떠오르고, 말은 끝없이 이어지고, 치킨은 차디차게 식어갔다.


하지만 되돌아보니 이제서야 보이는 것이 있다. 통닭을 가지고 집으로 걸어오는 아버지, 통닭집에서 통닭이 튀겨지기를 기다리는 아버지, 통닭을 보면서 들었을 생각들, 집에서 아이들과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 꿈과 이상, 오늘과 내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몸이 치우치지 않기 위해 통닭으로 중심을 잡으려는 아버지가 보인다. 자신의 삶에 대한 예언자는 되지 못했지만 자식들의 삶에 대해서만큼은 예언자가 되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하며 그림자가 말없이 뒤따르고 있다.


엄마에게 에어프라이가 잘 도착했다는 전화가 오기 전날, 쿠팡을 통해 냉동 상태의 옛날 통닭을 새벽 배송으로 보내드렸다. 아니나 다를까, 왜 그렇게 통닭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는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저녁에 통닭을 튀겨먹을 거라고. 술을 조금만 먹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면서도 늘 아버지의 안주를 준비하는, 참 기묘한 모습이다. 둘러앉아 먹을 자식도 없고, 밤새 얘기 나눌 거리도 사라진 엄마와 아버지. 어쩌면 두 분도 시간 여행을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from. 기록 디자이너 윤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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